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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는 아직 그의 이름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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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는 아직 그의 이름을 지울 수 없다’

입력
2014.09.0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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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WBC 일본전 선발 출전 완봉.... 지금은 대표팀의 든든한 자물쇠로

"후배들에 경험 전수, 금 가져올 것"

봉중근. 연합뉴스
봉중근. 연합뉴스

봉중근(34ㆍLG)에게 태극마크는 남다르다. 신일고 2학년을 마친 1997년 곧장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한 봉중근은 애틀랜타에 입단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다. 신시내티 소속이던 2006년에는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로 부름을 받았다.

봉중근은 태극마크의 첫 경험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봉중근은 “미국에서만 생활하다가 국가대표로 뽑혀 한국의 선ㆍ후배들과 함께 뛰니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단 번에 달랠 수 있었고, 매 경기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 떠올렸다. 이후 국가대표 터줏대감이 된 봉중근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 이듬해 열린 제2회 WBC 일본과 맞대결에선 선발로 등판해 1-0 완봉승을 거뒀고, 2라운드 3번째 일본전에서도 4-1 승리에 앞장섰다. 당시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현 뉴욕 양키스)에게 굴욕을 안긴 날카로운 견제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일본 타도에 앞장선 봉중근에겐 안중근 의사를 빗댄 ‘봉의사’란 별명이 생겼다.

모든 것을 이룬 봉중근은 굳이 인천 아시안게임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한국 야구는 봉중근의 이름을 빼 놓을 수 없었다. 엔트리에 포함된 직후 그는 “구단을 대표해서 나라를 위해 뛰는 건 언제든 영광”이라면서 “그 동안 내가 받은 혜택과 영광을 이제 후배들과 국가에 돌려주고 헌신하는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봉중근은 8월 들어 8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08로 4강 싸움에 유리한 고지를 점한 LG의 뒷문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또 올 시즌 주자가 있을 때 피안타율도 2할4푼1리로, 주자가 없을 때(0.288)보다 훨씬 낫다. 국내 최고의 견제 능력도 그만의 장기다. 그만큼 위기에 강하고,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함께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된 임창용(38ㆍ삼성)이 최근 부진한 점을 감안하면 봉중근의 어깨는 더 무겁다. 게다가 병역 미필 선수들과 국제대회 경험이 적은 선수들이 대거 출전한다. 때문에 대표팀에서도 고참이 된 봉중근은 팀의 리더로 분위기를 이끌 책임이 더 생겼다. 봉중근은 “처음 국가대표가 됐을 때 선배들의 조언이 큰 힘이 됐다. 이번에 어린 선수들이 100% 자기 공을 던질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이어 통산 다섯 번째 태극마크를 달게 된 봉중근은 “홈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기대보다 부담감이 크다”면서도 “평소와 같이 따뜻한 응원을 해 주시면 기필코 금메달을 가져오겠다”고 다짐했다.

성환희기자 hhsung@hk.co.kr

●봉중근은

생년월일 1980년 7월15일

신체조건 190cmㆍ98kg

유형 좌투좌타

소속팀 LG 트윈스

출신교 수유초-신일중-신일고

프로데뷔 2007년 LG 트윈스(신인 드래프트 1차)

올 시즌 성적 1승28세이브4패, 평균자책점 3.16

수상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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