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한 흑인작가인 리처드 라이트는 어린 시절의 꿈과 낭만, 슬픔을 담은 블랙보이라는 소설에서 오늘날 한국인이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미국 인종차별의 험준한 환경과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회적 불평등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던 시대적 부조리를 자전적 소설에서 차분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피부색이 검다고 머릿속까지 검게 취급 당하는 상황에서 검은 지식인답게 자신과 흑인을 대변해 미국사회에 나름의 목소리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소설 속의 한 장면은 멤피스에서 그의 고모가 사는 시카고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처음 전학 간 시카고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신고식이었다. 권투시합을 위해 링이 설치되고 두 흑인이 올라 시합을 하게 된다. 링 주위에는 백인을 포함한 흑인들의 응원과 아우성이 들린다. 그 시합에서 리처드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상대를 향해 주먹을 달린다. 그는 흑인이 미국사회에 가지는 한계와 벽을, 그리고 백인들에 대한 분노와 외침을 주먹에 담아 상대 흑인을 향해 날리고 있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과 절망의 순간에 그는 문득 정체성에 대한 외로운 확인과 왜곡된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을 둘러싼 치열한 국제정치에서 통일은 더 이상의 우리들의 ‘영원한 과제’가 돼서는 안 된다. 남북분단이 고착되고 민족 이질화가 거듭할수록 우리들은 통일이라는 과제의 무거움과 역사적 책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시대의 문제라기 보다는 한민족 역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분단과 상호 민족적 괴리의 와중에서 대안과 해결에 대한 미온적 태도와 무관심이 존재한다면 우리들은 역사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 민족적 정체성과 단일민족의 투명한 칼라가 현대사회의 시대적 대안은 될 수 없어도 최소한 그 뿌리에 대한 결속과 확인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독일통일을 보자. 전체 게르만 민족의 운명을 오도했던 독재자가 있었을지라도 전후 독일은 전체 국민과 정부가 민족통일에 대한 지속적인 의지와 꿈을 현실화하는데 매진하고 있다. 그들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 전전 연합국이었던 주변국에 대한 독일국민의 강렬한 통일의지를 수시로 전달하고 있다. 같은 민족이었던 동독에 대해서는 국민에게 다가가는, 동족을 우선하는 정책적 접근을 통해 서로의 간격을 좁히는데 주력하고 있다. 동독의 자유와 통일에 대한 갈망과 염원은 베를린 장벽의 와해로 구체화했다. 서독의 오랜 통일노래가 울러 퍼지는 순간이었다. 통일은 자유를 의미했고, 곧 독일민족의 쾌거였다. 그리고 더 이상 서독, 그리고 동독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국제사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독일일 뿐이었다.
우리의 경우 남북이 링 위에 올라 서로를 적대시하고 주먹을 날리는 상황에서 얼마나 소모적이고 부질없는 민족적 에너지의 낭비와 유실을 경험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통일에 대한 의지와 강렬한 염원이 있어도 어딘가에서 부딪히는 한계와 벽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절망하고 있지 않은지, 혹시 같은 피를 나눈 상대방을 향해 주변국가에 대해 갖는 역사적 피해의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분단의 책임자들에게 항변해야 할 목소리를 같은 민족에게 소모적으로 내지르고 있지 않은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한국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에는 부족한, 유아적 발상의 틀 속에 갇혀 몸부림치는 민족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의 주권행위를 하는 국가는 미래와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닐까 생각한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계란의 틀을 깨는 ‘아프락삭스’의 아픔과 기대가 필요하듯 국가적으로 미래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수 있는 ‘성인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결단과 행동이 필요하다. 통일은 우리들의 진정한 합의와 실천의지에 따른 것이어야지 남의 눈치를 보는 유아적 행동의 연장선에서 이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김진환 한국방송통신대 강원지역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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