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순해지고 바람 슬슬 일어나는 9월이다. 숲길, 흙길 걷고 싶었다면 몸 움직여볼 때다. 마땅한 곳, 퍼뜩 생각나지 않을 때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 떠올린다. 성곽 주변으로 산책로 잘 만들어져 있고 서울에서 멀지도 않다. 치열했던 역사의 흔적 오롯한데다 유네스코가 가치를 인정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니,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는 곳으로 이만한 장소도 드물어 보인다. 나무 많으니 그늘도 넉넉하다. 바람 안고 걸으면 후텁지근했던 여름날의 기분이 말끔하게 씻긴다. 추석 연휴, 짬이 날 때 가족끼리, 연인끼리 찾아도 좋을 곳이다. 몸도 마음도 가을처럼 상쾌해지는데 필요한 시간은 딱 한나절이다.
● 먹먹한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에는 치열한 역사가 흐른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산성 서문(西門)을 나서 한강 동쪽 삼전도(현재 송파구 삼전동 일대)로 간다. 가서,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니 이전 해 겨울부터 이어지던 병자호란(1636~1637)이 일단락된다. 10만 청나라 군대의 느닷없는 진군에 황급히 한양을 떠나 산성으로 피신한지 47일 만의 일. 적장 앞에 머리 숙인 왕은 소리도 못 내고 울고, 이를 바라보는 민초들은 말을 잃고 곡소리만 낸다. 이렇듯 떠올리면, 가슴 먹먹한 역사의 현장이 여기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마다 그날의 울음소리 오롯한데, 여태 남은 녹음은 이리 화사하니 또 먹먹하다. 백제시대 축조된 것으로 전하는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천연 요새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현장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산성이다.
걷기의 출발은 지화문에서 한다. 산성의 남문(南門)이자 정문이다.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 때 통과한 문이다. 그 겨울 앙상했을 지화문 앞 느티나무에는 녹음이 여태 남았다.
흙길 걷고 돌계단도 오른다. 소나무 숲 그늘에 들어 숨도 고른다. 영춘정에 닿을 무렵 뒤돌아보면 눈이 호강한다. 성벽이 산세에 맞춰 오르내리며 굽었는데, 이 모습 어찌나 미끈한지… 투박하고 거칠 것 같던 산성의 성벽은 거인이 산허리에 그린 그림이었다. 해발 500m의 험준한 지형을 따라 11.7㎞(본성 9㎞, 외성 2.7㎞)의 성벽이 뱀의 전진처럼 소리 없이 역동적으로 뻗어 있다.
계속 가면 수어장대. 산성 안에 남은 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니 꼭 본다.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세운 건물이 장대다. 산성 안에는 총 다섯 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이 여기다. 2층으로 지은 건물이 옹골차고, 굵고 진한 현판의 필치에 힘이 넘친다. 그 앞에 서면 이 당당한 자태에 가슴 벅차다. 군사들을 호령하던 장군의 기백을 여기서 본다. 하나 더 추가하면, 수어장대 옆 보호각에 보존된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은 보고 나온다. 병자호란의 시련을 잊지 말자는 의미 담아 영조가 지은 글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천지인 요즘이라 새삼 새로운 ‘무망’이다.
우익문(서문) 방향으로 가는 길에 소나무 숲에 숨어 있는 병암남성신수비(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기록을 새긴 비석)는 찾아본다. 선조들의 건축실명제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이라 흥미롭다. 우익문은 산성의 4대문 가운데 조형미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성벽 돌멩이들이 차곡하게 쌓인 모습이 산성답지 않게 곱다. 인조가 삼전도로 갈 때 이 문으로 나갔다.
우익문 옆 언덕은 남한산성 최고의 전망 포인트니 잊지 말고 챙긴다. 청계산, 관악산, 대모산, 남산, 북악산, 북한산, 아차산, 도봉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울 풍경이 압권이다. 야경은 또 어찌나 로맨틱한지, 성곽 따라 걷지 않고 이 때 맞춰 여기만 다녀가는 사람들 부지기수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거리에 이렇게 훌륭한 천연 전망대가 있었다.
우익문 지나 전승문(북문)까지는 간다. 가는 길에 연주봉옹성은 구경한다. 남한산성의 다섯 개의 옹성(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작은 성)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곳이다. 제5암문(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낸 비밀통로)으로 나가면 된다. 최근 복원한 탓에 묵은 멋은 덜해도, 장쾌한 전망은 끝내준다. 산허리 에두른 성벽도 잘 보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소나무 도열한 흙길 따라가면 전승문. 전쟁에 승리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패전의 무대다. 병자호란 당시 약 300명의 조선 병사들이 이 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하지만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한다.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였고, 또 최대의 패전이었다. 이때 잊지 말자고 정조가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 좌익문(동문)까지는 한갓지다. 동장대(동쪽의 장대)터에서는 한봉과 벌봉을 잇는 외성(外城)을 음미한다. 능선타고 이어지는 성벽이 또한 ‘작품’이다. 길은 장경사를 지난다. 산성을 쌓을 때 전국에 있는 승군(僧軍)이 소집됐는데, 이들은 산성 안에 있는 아홉 개의 사찰에서 지내며 성을 관리했다. 장경사는 충청도 지방 출신 승군이 머물던 곳인데,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도 피해가 적어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됐다. 대웅보전과 요사채가 참 예쁘다. 여기 지나면 고상하고 우아한 멋 넘치는 좌익문이다. 2차선 도로 건너 다시 숲길 따라 가면 출발했던 지화문에 닿는다.
● 인조 머물던 행궁에 살포시 내려앉은 가을 볕
남한산성 도착할 무렵 산성터널 지난다. 이 터널 지나면 성 안으로 들어온 거다. 지금의 산성로터리 주변, 음식점 밀집해 있는 곳들 모두 옛날에는 사람 살던 마을이었다. 로터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알게된다. 준봉들이 병풍처럼 에둘러 있으니 성 안에 들어온 느낌 물씬 난다. 이 너른 마을에 80여 곳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었단다. 그리고 사찰과 전각, 정자 등 옛 건물을 비롯해 200여개의 문화재가 지금도 산재해 있다. 이러니 성곽길 걷기 부담스럽다면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걸은 다음 이곳들 돌아본다.
남한산성행궁은 꼭 들른다. 왕의 임시거처가 행궁인데, 조선의 행궁 가운데 종묘와 사직을 둔 유일한 곳이 여기다. 유사 시 임시수도 역할을 수행했던 곳임을 말해주는 대목. 실제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여기서 머물렀다. 정문인 한남루 지나 건물들 살피고 후원도 거닌다. 절박하고 또 속절없던 그날이 지나간 자리가 이리도 평온하다. 행궁 들머리 침괘정에 앉아 바람을 맞고, 연못이 있는 지수당에서는 나무 그늘 드리운 벤치에 앉아 게으름도 부려본다. 산성 안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 됐다는 망월사(원 건물은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복원한 것이다)에서는 풍경소리 들으며 탑돌이도 해본다.
순한 볕 내려 앉은 오후, 남한산성이 참 곱다.
●여행메모
남한산성 탐방코스는 다양하다. 이 가운데 산성로터리→전승문(북문)→우익문(서문)→수어장대→지화문(남문)→영춘정→산성로터리(3.8km, 1시간 20분)가 성곽 따라 걷기 적당한 코스다. 산성의 상징인 수어장대와 전망 장쾌한 우익문을 지난다. 산성로터리→영월정→숭렬전→수어장대→우익문(서문)→국청사→산성로터리(왕복 2.9km, 1시간) 코스도 사람들 많이 걷는다. 탐방코스에 관한 정보는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홈페이지(www.ggnhss.or.kr)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장경사, 망월사, 좌익문(동문)은 차로도 갈 수 있다. (031)777-7500
광주(경기도)=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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