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스로 각광받던 신흥경제… 자원 수출 의존한 성장 한계 드러내
우크라 사태로 치명상 입어… 외자도 순유출 올 0%대 성장 전망
제조업 살려 위기 타개 안간힘… 극동·시베리아 우선 개발지역 선포
러시아 경제가 위태롭다. 러시아는 2008년 미국발(發) 경제 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브라질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브릭스(BRICS)의 한 축으로 각광 받으며 대표 신흥국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그러다 2012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4%로 주춤하는가 싶더니 지난해 1.3%로 추락했다. 심각한 것은 올해 0%대 저성장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올해 러시아 경제는 연초부터 대형 악재가 겹치고 있다. 2월에는 미국이 양적완화 축소를 시사하면서 다른 신흥국들과 마찬가지로 환율이 요동쳤다. 뒤이어 3, 4월에 우크라이나 사태와 크림반도 합병이 이슈로 떠올랐다. 이에 반대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경제제재가 잇따르면서 외국인 투자가 순유출세를 기록했고 이는 그대로 환율과 주가에 반영됐다. 친유럽 성향의 정부가 새롭게 들어선 우크라이나는 5월 대통령 선거를 거쳐 6월에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음으로써 독립국가연합(CIS)에서 이탈했다.
안정될 것으로 기대했던 우크라이나 문제는 지난 7월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미사일 피격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시금 타올랐다. 미국과 EU 등 서방국들은 러시아가 추락의 직접 또는 배후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내세워 경제제재를 확대했고 러시아도 질세라 제재 참여국의 식료품 수출을 1년 동안 전면 금지했다.
수위 높아지는 EU-러 통상 분쟁
EU는 그 동안 미국에 비해 러시아 제재에 소극적이었다. 양측의 교역과 투자 의존도가 워낙 높은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EU는 러시아 제1의 교역 상대이며, 러시아는 EU에 미국과 중국 다음의 교역 상대다. 러시아는 주로 원유와 천연가스 등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EU는 식료품과 제조설비, 기계장비 등을 수출한다. 자국의 제조업 기반이 부족한 러시아로서는 상당 부분을 유럽의 기술과 설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화학제품, 통신 및 의료장비, 기타 소비재에 대한 의존도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다. 마찬가지로 유럽도 원유와 천연가스 소비의 상당부분을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교역 품목을 따져 봐도 이 둘의 상호 의존도가 드러난다.
투자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기준 러시아 전체 해외투자 누적액의 76%를 유럽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영국ㆍ독일 기업의 에너지ㆍ제조업, 프랑스의 유통업 투자는 상당한 수준이다. 러시아 역시 전체 해외투자 누적액의 47% 가량을 유럽에 투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식품ㆍ농산물 수입제한 조치는 양측에 한껏 긴장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말레이 항공기 격추 이후 결정된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 조치는 이전과 달리 미국보다 EU가 주도한 경향이 강했다. 러시아의 대응 제재는 이런 점을 감안해 미국보다 EU를 겨냥해 이번 제재를 결정한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전체 식료품 수입의 약 40%를 유럽산이 차지했다. 금액으로는 약 119억 유로(15조9,200억원)에 달한다. 제재 시행 직후부터 러시아는 발 빠르게 대체 수입국 발굴에 나서고 있다. 육류 및 해산물은 주로 중남미 국가에서, 채소와 과일은 중국, 터키, 이집트 등에서 수입 쿼터를 확대해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식료품에 이어 더 큰 분쟁은 에너지 부분에서 발생할 수 있다. ‘러시아가 (천연가스 파이프)밸브를 잠그면 유럽이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연가스는 러시아가 유럽을 정치ㆍ외교적으로 통제하는 중요한 ‘무기’다. 해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유럽은 전체 천연가스 소비의 약 30%, 원유 소비의 약 35%를 러시아에 의존한다.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 선진국들은 이 비중이 낮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그렇지 못하다. 천연가스의 경우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과 불가리아는 100%,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8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EU와 러시아 간에 벌어지고 있는 통상 분쟁의 열쇠는 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안정에 달려 있다. 말레이 항공기 사고 수습과 우크라이나 내분이 예상보다 빠르게 해결된다면, EU와 러시아는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빠르게 경제협력 분위기로 전환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동남부 개입 주장은 갈수록 힘을 얻어간다. 양측은 수입금지 품목 확대 등 서로 경제 제제를 강화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인구 감소ㆍ생산성 악화, 저성장 당면과제
지난해 러시아가 1.3% 성장을 기록했을 때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저성장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누구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뭉뚱그려 러시아 경제가 오랫동안 지녀 왔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정도다.
러시아 경제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인구 감소다. 인구감소 추세는 한번 시작되면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다. 출생인구에서 사망인구를 제외한 러시아 내국민의 순인구 감소는 1992년부터 시작됐고 이주민 숫자를 감안한 전체 러시아 인구의 감소도 2019년을 전후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러시아연방통계청이 2010년 내놓은 인구 시나리오를 보면 러시아 인구는 올해 1억4,300만명에서 2030년에 1억3,100만명으로 감소할 전망이다.
러시아 저성장의 두 번째 원인은 산업생산성 악화다. 경제위기를 겪었던 2009년 이후 회복 국면에 있는 지금까지 추세를 살펴보면, 산업생산성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갈수록 증가 폭이 감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전체로는 0.4% 증가하는데 그쳤고 광업 1.1%, 제조업은 0.5% 등 주요 산업부문이 모두 경제성장률을 한참 밑돌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전체 수출의 약 70%, 재정 수입의 50%를 차지하는 광업 생산 증가율이 계속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올해 들어서는 연초부터 우크라이나 문제를 둘러싸고 역내 긴장감이 고조돼 외국인 투자도 순유출세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제조업 육성으로 돌파구 기대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는 관세동맹의 다음 단계로 추진하고 있는 지역통합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EU)을 내년 1월 출범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CIS 이탈로 EEU의 효과는 빛이 바랬다. 관세동맹이 구성될 때만 해도 EEU는 2012년까지 출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3년이나 늦어졌고 추가 회원국 없이 출범한 것만 봐도 그렇다. 러시아는 다른 회원국들을 끌어 모아야 하지만 우크라이나 문제와 서방과 경제 마찰이 확대되면서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은 CIS이면서 EEU 가입을 확정하지 못한 다른 국가들은 망설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경제통합체에 가입해 얻을 경제적인 이득이 불분명하거나 없는 상황에서 EU와 러시아 혹은 중립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유리할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일단 CIS가 아닌 국가들과 FTA 체결을 대안으로 선택한 듯하다. 신흥국끼리 결속을 다지면서 유럽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전략이다. 러시아는 이집트, 터키, 인도와 FTA 체결을 협상 또는 준비 중에 있다. 아울러 중국 및 중남미 국가들과의 교역도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다.
경제활력 저하라는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러시아 정부의 해법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해 자국 내 제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특히 서부 대도시 지역에 편중된 인구와 산업시설을 분산하기 위해 지방의 제조업 투자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극동,시베리아를 ‘우선개발지역’으로 선포해 특별경제구역을 지정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의 법인 설립이나 프로젝트에 일정 기간 세금을 면제해주는 등 특혜를 확대해 나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극동개발부’를 신설해 외국인 투자유치에 전권을 부여한 상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해결의 단초를 찾지 못할 경우 향후 서방의 러시아 제재는 강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주요국들이 대러시아 투자를 걸어 잠그기 시작했고 수출 활로마저 질식당하고 있는 러시아에 과거 어느 때보다 외국기업에 친화적인 투자 환경이 조성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소병택 코트라 CIS지역본부장ㆍ모스크바 무역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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