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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성호사설(星湖僿說)

입력
2014.08.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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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많은 선인(先人)들을 만나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인물들이 있다. 선향(仙鄕ㆍ저승)으로 먼저 떠난 지 오랜 사람들이지만 후대인들이 끌리는 것은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비록 명국(冥國ㆍ저승) 사람들이지만 생존의 행적을 되새길 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경우 당대에 화려한 업적을 남겼던 위인들보다는 채 꽃피우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자신의 의(義)를 추구하다가 좌절한 사람들에게 더 시선이 가 닿았다. 왜 그런지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지만 승자보다는 패자에게 더 애정이 갔던 셈이다. 그 중의 한 명이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ㆍ1681~1763) 선생이다. 평생 벼슬 한 번 하지 못했지만 집안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집안이 너무 좋았기에 벼슬을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집안은 남인(南人) 명가였다. 남인은 크게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는데 대략 분류하면 청남은 대대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했던 혁신세력이고, 탁남은 서인과 비슷한 보수색채를 지닌 세력이었다. 성호 이익의 출생지는 평안도 운산군(雲山郡)이었다. 숙종 7년(1681) 10월 18일 태어났는데, 운산은 부친인 육우당(六寓堂) 이하진(李夏鎭ㆍ1628~1682)의 유배지였다. 이하진은 청남 영수 백호(白湖) 윤휴(尹?ㆍ1617~1680)와 함께 북벌(北伐)과 신분제 완화 등의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정권이 서인에게 넘어가면서 급전직하 몰락했다. 윤휴는 사형당하고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했던 이하진은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 가서 이익을 낳았던 것이다. 이익이 만 한 살 때인 숙종 8년(1782) 부친은 배소(配所)에서 사망하는데, 숙종실록은 “분한 마음에 답답해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문인 윤동규(尹東奎)가 쓴 행장(行狀)에 따르면 이익은 “허약한 체질이라 잔병이 많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모친 권씨는 허약한 아들을 염려해 늘 주머니에 약을 달아놓았으며 스승에게 나가서 글을 배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익은 어려서부터 공부에 몰두했다. 그 당시 사대부가 자제들 대부분 그러했듯이 과거에 뜻을 두었을 것이다. 만 스물네 살 때인 숙종 31년(1705) 과거에 응시했는데, “책문(策問)으로 초시에 입격했으나 녹명(錄名)이 규식에 어긋나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녹명이란 과거응시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제도인데, 부친과 조부 및 외조부, 증조부의 성명과 벼슬 사항 같은 인적 사항을 뜻하는 사조단자(四祖單子)와 6품 이상 조관(朝官)의 신원보증서인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해서 심사받는 과정이었다. 녹명에 걸렸다는 사실은 과거응시 자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인데, 아마도 청남(淸南)이란 집안 당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나마 이는 양반이었다. 이듬해인 숙종 32년(1706) 그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 형 섬계(剡溪) 이잠(李潛)이 집권 노론에서 세자(경종)을 해치려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하(杖下)의 귀신이 되면서 이익의 미래까지 아주 암담해졌다. 이잠의 죽음에 대해서 숙종실록 보궐정오는 “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춘궁(春宮ㆍ세자)을 위해 죽는다는 뜻에 붙였는데, 어머니가 힘껏 말렸으나 그만두지 않고, 드디어 극형을 받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잠의 상소 사건이 일어나자 “이잠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혹시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손을 흔들며 피했다”고 전해진다. 이익 또한 “화난(禍難)을 당해서 곤박(困迫)한 지경에 빠져 과거 공부에 뜻을 접었다”라고 전해지는 것처럼 출사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했다. 출사를 포기한 지식인이 무엇을 하겠는가? 이때 이익의 친구가 되어준 것이 집에 있던 장서 수천 권이었다. 과거공부란 그때나 지금이나 출세를 위한 좁은 문이자 규격에 갇힌 좁은 세계에 불과하다. 그렇게 과거를 포기하니 드넓은 학문의 세계가 보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은 한 불우한 지식인이 학문과 농사를 병행하는 사농(士農)일치의 삶 속에서 쌓은 한국학의 금자탑이다. 사(僿)자는 ‘잘게 부수다’라는 뜻인데, 한 주제를 자세하게 천착한다는 뜻이다. 천지문(天地門), 인사문(人事門), 시문문(時文門), 경사문(經史門)으로 분류되는 성호사설은 전해지는 주제만 3,000여 항목이 넘는다. 이익이 이런 방대한 학문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공부를 포기한 결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천박해진 현재의 학문 풍토로 성호 이익의 학문세계에 범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익의 학문정신을 지향한다는 뜻에서 감히 필자의 호 천고(遷固)를 쓴 천고사설(遷固僿說)을 상재한다. 진정한 선비의 정신세계와 그들이 쌓은 한국학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그런 눈으로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면 어떤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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