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텍스 '정확한 패션' 추구… 대중 심리·기호 꿰뚫어 본 후 디자인에서 판매까지 2주 걸려
여떻게 저가 전략 유지하나… 광고·마케팅 비용 확 줄인 대신 매장 위치와 인테리어에 집중
이른 가을 거리가 온통 울긋불긋‘칩시크(Cheap-chic: 저렴하고 세련됐다는 뜻)’패션으로 출렁인다. 몇 년 전부터 전 세계 패션업계에 불어닥친 ‘칩시크’ 열풍은 불황이 가져다준 세태를 반영하듯 새로운 유행의 역사를 써가고 있다. 그 유행은 최첨단의 트렌드를 가장 빠르고, 저렴하면서도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반복되는 사계절에 맞춰 대량으로 쏟아지는 유사하고 비슷한 '패스트(fast) 패션' 속에서 소비자들에게 얼마만큼 차별화된 디자인과 컬러를 선보이느냐가 관건이다.
인디텍스가 말하는 ‘패션이란’
‘사회학의 거장’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그 짐멜(1858~1918)은 이미 110년 전 세계에‘칩시크’열풍이 불어 닥칠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는 저서 패션(1904)에서 “유행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와 결부시키는 일종의 문화화 과정이자 모방을 통한 동조화와 자기만의 개성을 추구하는 차별화의 전진과정”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특히 ‘창조ㆍ창작ㆍ완성’이란 의미의 라틴어 팍티오(factio)에서 유래한 '패션'에 대해 "주어진 선례의 샘플을 모방해서 사회적응을 위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또 하나의 창조적 과정”이라며“하나의 품목이 빠르게 패션 변화를 주도할수록 유사한 종류의 싼 제품에 대한 수요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행이란 모방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통해 전반적으로 비슷비슷해지면서도 작은 차이로 우월감을 갖는 자기 만족을 누리려는 본능적 욕구이며, 이 갈증을 해소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칩시크’패션이 오늘날 유행의 대세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첨단의 유행을 가장 빠르고, 가장 저렴하면서도 우리가 사는 도시의 가장 번화한 상점가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상품기획과 디자인에서부터 제조와 유통, 물류, 판매를 일괄하는 SPA 패션업체를 꼽으라면 단연 스페인 브랜드 ‘자라’를 들 수 있다. 자라는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패스트 패션의 대명사’로, 인디텍스는 자라 외에 마시모두띠, 10대들을 겨냥한 버쉬카, 스트라디바리우스 등 8개 브랜드를 보유한 업체다. 1975년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역에서 작은 옷 가게로 출발해 현재 전 세계 87개국에 6,400여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고 임직원수만 12만 여명에 달한다. 옷 가게 배달원 출신 창업자 아만시오 오르테가(78)는 올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4위 부자다.
지난 7월초 샤넬 프라다 등 세계 유명 디자인 브랜드 20여개 사가 참가해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14 가을/겨울 시즌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컬렉션 쇼. 이곳에서 선보인 최상위 0.1%만을 위한 명품 의류와 액세서리 등을 국내 매장에서 만나 보려면 적어도 4~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올 추동 패션 유행을 주도할 디자인을 예측하고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게 고안한 컬렉션을 3~4주 안에 국내 매장에서, 그것도 아주 저렴한 가격에 접한다면 불황의 여파로 주머니를 꽁꽁 싸매온 알뜰 부라도 자연히 닫혀있던 지갑을 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첨단의 디자인을 재해석하고 대중의 심리, 기호를 제대로 파악해 최대한 빨리, 최대한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이 인디텍스의 패션이자 핵심 사업모델인 것이다.
‘소비 심리’를 꿰뚫는 디자인
“인디텍스 비즈니스 모델의 중심에는 항상 고객이 있습니다. 매일 전 세계 6,400여개 매장에서 전달되는 매출 정보와 고객들의 피드백 자료를 통해 본사의 제품 개발팀과 디자이너들은 같은 시즌안에도 옷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갑니다. 물론 우리는 장인의 혼이 담긴 오트 쿠틔르 같은 명품이나 유행을 창조하는 선도자가 되려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항상 변화하는 오늘의 유행을 따라 시시각각 끊임없이 진화할 뿐이죠.”
인디텍스의 CCO(Chief Corporate Affairs & Communication Officer: 최고 대외교류 및 기업홍보담당자) 헤수스 에체바리아(51)는 국내 언론으론 한국일보와 처음 가진 서면인터뷰에서 인디텍스의 패션철학에 대해 "여타 브랜드와 같이 단순히 패스트 패션에 머물지 않고 첨단의 유행 감각과 소비자 심리의 간극을 바늘로 한 뜸 한 뜸 뜨듯 세밀하고 적절히 상품화하는 보다 ‘정확한 패션’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인디텍스가 추구하는 패션은 본능적일 정도로 감각적이다. 그는 “패션은 빠른 변화를 통해 즐거움을 줘야 한다. 일단 눈이 행복해야 하고 ‘따라쟁이’가 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창업자 오르테가는 옷 장사를 생선장사에 비유했는데 이는 "유행에 뒤떨어진 패션상품은 어제 잡은 생선처럼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얘기였다.
버버리 등 대다수 유명패션 브랜드가 매년 내놓는 신상품은 2,000~4,000종. 이에 비해 자라는 무려 1만1,000여종의 새로운 상품을 쏟아낸다. 이들 신제품은 1주일에 두 차례씩 스페인 라코루냐주 아르테익소 본사에서 비행기로 전 세계 매장에 뿌려진다. 그러다 보니 베이직 제품만을 고집하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자라 매장에 들어서면 다양하고 창의적인 디자인과 다채로운 색감의 옷을 수없이 고를 수 있다. 특히 2주일에 한 번씩 전 세계 매장 상품의 평균 70%를 교체할 만큼 상품 회전율도 빨라 한 번쯤 매장을 들렀다가 찜한 상품이 얼마 후 다시 찾은 매장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고객들도 숱하다. 이는 고객들의 매장 방문 빈도수를 높이고, 아닐 경우 충동구매를 자극하는 요인이 된다.
인디텍스가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강점은 역시 디자인 파워다. 에체바리아 CCO는 “본사에는 1,000여명의 디자인 관련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자라 브랜드의 경우 스페인 출신이 아닌 다국적 디자이너만 200여명에 달할 만큼 글로벌 시장 공략을 위한 다양한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들 디자이너는 매주 두 차례 이상 전 세계 매장 매니저들로부터 직접 전화로 각 지역에서 유행하는 패션 스타일에서부터 선호도 높은 색감, 원단에 이르기까지 각종 패션 정보와 고객 피드백내용 등을 신속하게 전달받는다. 또 이들은 유명 패션전문 블로거와 다양한 패션전문기관 등과 수시로 협의하고, 파리 밀라노 런던 등을 직접 방문해 현장에서 가장 유행하는 상품의 특징을 파악하고 재해석해 빠르게 새 디자인을 만들어낸다. 에체바리아 CCO는 “패션은 끝없이 변화하고 유동적이며 음식점이나 영화관 등 사람들의 일상이 숨쉬는 현장 속에 녹아있다”며 “특히 인디텍스 각 브랜드 매장은 가장 중요한 패션의 바로미터”라고 강조했다.
특히 자라 제품은 500여명의 디자이너들이 쏟아내는 기획 및 디자인을 바탕으로 본사와 인접한 11개의 자체 공장을 가동해 제품을 초고속으로 만들어 늦어도 2주안에 전 세계 점포로 투하한다. 디자인과 생산 유통 판매의 전 과정이 수직적 통합을 이루고 있어 이렇게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원단소싱을 비롯해 제조와 가공 등을 위한 협력 공급망도 인디텍스만의 강점이다. 전체 상품의 절반이상을 생산하는 유럽에선 스페인과 포르투갈, 터키가 주요 거점이며 이 밖에 남미(브라질 아르헨티나)와 아프리카(모로코), 아시아(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등 지역 별로 탄탄한 협력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
저가전략을 위한 조건
“세계 어디를 가도 대도시 한 복판에는 인디텍스 브랜드의 럭셔리하고 웅장한 대형 매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라 등 각 브랜드 매장은 인디텍스가 고객에게 직접 다가가는 살아있는 마케팅 현장이자 광고 그 자체이죠. 그래서 매장의 위치와 이미지, 멋진 인테리어 디자인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매력적인 쇼윈도우는 광고를 하지 않는 인디텍스가 고객을 매장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소통 수단입니다.”
실제로 인디텍스 본사 지하엔 모든 브랜드 가상매장이 실제 크기로 설치되어 있다. 각종 제품의 전시는 물론 매장에서 흐르는 음악까지 실제 매장과 같이 꾸며져 있다. 직원들은 이 가상의 매장에서 소비자 시각으로 체험하고 개선점을 찾는다. 인디텍스는 각 브랜드 매장을 18개월마다 새롭게 개조하는데, 매년 평균 300~400개의 매장 리노베이션에 14억 유로(1조8,700억원)를 투자한다.
이렇듯 대규모 매장을 운영하면서도 인디텍스는 어떻게 저가 전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일반 브랜드는 6개월 전에 결정된 디자인을 갖고 대량 생산에 나서기 때문에 사전에 엄청난 광고 및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인디텍스는 현재 유행하는 디자인 패션을 판매하고 있어 매장을 제외하곤 마케팅 투자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평균 마케팅 비용은 전체 비용 중 0.5%를 넘지 않는다.
또 전체 생산물량의 절반 이상을 다품종 소량 생산 원칙에 따라 만들기 때문에 재고 부담이 거의 없다. 특히 아무리 인기 높은 '완판' 제품이라도 추가로 찍어내는 법은 없다.
바로 이 점이 인디텍스만의 재고관리 비결이다. 에체바리아 CCO는 “지난해 최고 인기제품은 블루 앤 화이트 프린트 드레스였지만 잘 팔린다고 이를 대량 생산하지는 않았다”며 “디자인 무늬가 조금은 다르거나 원단이 다른 제품으로 차별화해 항상 새롭고 진화된 디자인 제품을 소량 제작, 상품군을 다양화하면서도 재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이 인디텍스의 비법”이라고 강조했다.
국가별로 가격이 다른 이유.
인디텍스는 지난해 총 매출액 167억2,000만유로로 세계 1위 의류업체 자리를 지켰다. 올해는 스페인 경제회복에 힘입어 지난 상반기 매출 증가율이 전년 동기 대비 11%를 기록하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타고 있다. 특히 금년엔 글로벌 마케팅 강화를 위한 온라인 판매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매출 증가율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에체바리아 CCO는 “올 가을엔 한국과 멕시코 고객들도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디자인의 자라 제품을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며 “중국에서도 알리바바닷컴의 T몰을 통해 온라인 쇼핑 사이트를 오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율리스크는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주력 시장인 러시아와 터키에서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직격탄을 맞기도 했다. 이런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러다 보니 국가별 환율 변동과 시장 특성에 맞춰, 제품 가격을 다르게 책정하고 있다. 에체바리아 CCO는 “환율도 중요한 변수이지만 인디텍스 브랜드가 각국 시장에서 어느 정도 위상과 점유율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책정한다”며 “하지만 어떤 경우든 고품질의 좋은 디자인 제품을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제공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스페인은 물론 포르투갈과 그리스 등에서 인디텍스 제품 가격은 다른 유럽이나 미국, 중국 등에 비해 평균 30% 이상 저렴하다.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자라 제품가격이 다른 지역보다 비싸다는 고객 불만도 따지고 보면 다른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국내 패션의류가격이 감안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라는 국내에서 일본계 SPA브랜드인 유니클로에 밀리고 있고, 스웨덴의 H&M등과도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에체바리아 CCO는 향후 H&M이나 유니클로 등과의 차별성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인디텍스는 경쟁자들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지금 거리에서 유행하는 첨단의 디자인과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정확한 패션’을 만들어 낼 것인가”라고 강조했다.
장학만 선임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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