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 지음ㆍ정윤조 옮김
문학수첩 발행ㆍ392쪽ㆍ1만3,000원
일상이 참혹히 부서지는 과정 통해 인간과 세상 본질 날카롭게 꿰뚫어
블랙유머와 폭력적 상황 낭자...美 고딕문학의 거장 국내 첫 소개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운명이에요. 우리의 눈은 눈가리개로 덮여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눈가리개를 풀고 세상에는 사실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아내죠. 그런 게 바로 구원이에요.”(‘선한 시골 사람들’ 중에서)
플래너리 오코너(1925~1964)의 소설에서 세계는 근본적으로 악의로 구성돼 있다. 평범한 일상의 한 때가 세계의 구성 원리인 악의와 조우하면서 급작스럽고도 참혹한 죽음을 향해 정주행 하는 부조리극이 그가 축조한 소설의 기본 형식이다. 작품 속에 낭자한 블랙 유머와 음산한 분위기, 그로테스크한 인물, 폭력적 상황 등으로 인해 미국 고딕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의 단편들에는 미국 남부의 보수적이지만 기품 있는 부인네들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해 “어디든 사람 된 도리에 맞게 사는 곳은 없더라” “진실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같은 대사들을 반복한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작품 속 대사이자 대표작일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눈가리개가 풀려버리는 잔인한 구원의 순간들을 채집한 기록들이다.
미국 조지아주 출신의 여성 소설가 오코너는 한국에는 본격적으로 작품이 번역되지 않아 풍문으로만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대학입학자격시험(SAT) 위원회 추천도서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작가다. 25세에 홍반성 낭창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39세를 일기로 요절한 오코너는 오랜 투병에도 아이러니와 유머를 잃지 않으며 하드보일드한 감성으로 날카롭게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작품들을 써냈다. 한국에 처음 번역되는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단편으로 더 평가받는 오코너의 대표적 소설집으로, 1971년 출간된 그의 단편 전집은 사후 출간된 작품임에도 이례적으로 이듬해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오헨리 단편소설상, 미국 예술학회상 등도 받았다.
코엔 형제의 영화들이 여기서 잉태됐겠다 싶은 이 소설집에는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렸다. 테네시 왈츠를 들으며 멋진 신사에게 구애를 받던 처녀 시절을 추억하는 할머니의 감상으로 인해 여행길에 나선 온 가족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표제작을 비롯해 대부분의 작품들이 미국 남부 사람들의 위선과 정신적 도태를 보여준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인물들의 일관된 멘털은 법과 윤리, 종교가 ‘이제야’ 붕괴됐다는 때늦은 탄식인 동시에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그릇된 자만의 표현이다.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예컨대 ‘당신이 구한 생명은 당신 자신의 것인지 모른다’의 노파는 서른 살의 장애인 딸을 젊은 목수와 결혼시키고자 술수를 쓰지만, 신혼여행길에 목수는 돈과 자동차만 챙겨 신부를 버리고 떠난다. ‘선한 시골사람들’에서는 무신론자인 노처녀 철학박사가 선량한 성경 장수 청년의 어수룩한 유혹을 받고 열정에 몸을 내맡기지만 헛간의 이층 다락방에서 돌변해버린 청년에게 의족을 빼앗기고 버려지는 모욕을 당한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서의 인간관계는 ‘망명자’에서 아찔하게 재현된다. 매킨타이어 부인의 농장에 나치를 피해 폴란드에서 망명한 귀자크 가족이 일꾼으로 들어오면서 백인 하인 부부와 흑인 일꾼들 사이에 일대 교란이 일어난다. 성실한 데다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귀자크 때문에 해고 위기에 처한 쇼틀리 부부는 농장주와 귀자크 사이를 교묘하게 이간질하지만, 농장주는 귀자크의 수익성 때문에 오랜 세월 믿고 의지해온 쇼틀리 부부를 해고한다. 하지만 귀자크가 수용소에 남아 있는 여동생의 구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결혼을 조건으로 흑인 일꾼의 임금을 가로채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매킨타이어 부인은 귀자크에게 역겨움을 느끼고 쫓아내려 한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순진하고 불쌍한 여자아이를 이곳에 데려와서 검둥이 같은 것과 결혼시킬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네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매킨타이어 부인의 비난에 귀자크는 절망하며 서툰 영어로 말한다. “사촌, 흑인 상관 안 해. 수용소에서 3년.” 부인의 품위와 생명의 절규가 비극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이다. 선과 악을 수박 자르듯 명쾌하게 분리해낼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선인가, 악인가 되묻는 절묘하고도 기막힌 상황들이 한달음에 책을 읽어내도록 독자의 등을 떠민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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