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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텃밭 가꾸다 보니 10년 갈등이 눈 녹듯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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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텃밭 가꾸다 보니 10년 갈등이 눈 녹듯 사라졌어요"

입력
2014.08.2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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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내 길 사이로 임대·분양아파트 경찰차 출동 갈등 심했는데

2011년 텃밭 조성 후 분위기 반전, 통합 모범 사례로 서울시 대상 받아

서울 금천구 벽산아파트 주민들이 옥상 텃밭에 계분, 쌀겨 등 자연 비료를 일일이 흙과 버무리는 작업을 하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1,000여개의 화분으로 구성된 텃밭을 주민들이 함께 가꾸며 생산한 농산물로 어려운 이웃을 돕다 보니 자연스레 분쟁도 사라지고 서울지역에서 으뜸 마을이 됐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서울 금천구 벽산아파트 주민들이 옥상 텃밭에 계분, 쌀겨 등 자연 비료를 일일이 흙과 버무리는 작업을 하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1,000여개의 화분으로 구성된 텃밭을 주민들이 함께 가꾸며 생산한 농산물로 어려운 이웃을 돕다 보니 자연스레 분쟁도 사라지고 서울지역에서 으뜸 마을이 됐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도시민들은 아파트 옥상이라고 하면 우선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떠올린다. 청소년들의 주요 탈선 장소도, 투신자살 사건의 주무대도 옥상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화재 시 주요 대피장소인데도 상당수 아파트에선 이런 사건사고를 예방한다며 옥상 출입구를 막아 놓는다. 그 만큼 아파트 옥상 쓰임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아파트 옥상을 통합, 화합의 메카로 적극 활용하는 마을이 있다.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자리잡은 벽산아파트다. 여기는 임대와 분양주민들이 뒤섞여 있다 보니 연일 갈등의 연속이었다. 2011년 텃밭이 옥상에 조성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주민들간 뒤섞여 텃밭을 가꾼 후, 부산물인 농산물을 불우이웃에게 나눠주다 보니 대립도 봄철 눈 녹듯 사라졌다. 텃밭은 벽산아파트 상징이 됐다.

26일 오전에도 벽산아파트 2단지 관리동 옥상에는 주민 10여명이 모였다. 330㎡ 크기의 옥상에는 1,000여개의 화분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배추 한 포기가 넉넉하게 들어갈만한 화분에 주민들은 계분, 쌀겨 등을 뿌리며 일일이 흙과 버무린다. 작물이 잘 자라도록 친환경 비료를 혼합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 이들은 따가운 햇살 탓에 금세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혔지만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하다. 주민인 김수연(68ㆍ여)씨는 “다음주 이 곳에 배추를 심어, 불우이웃들에게 김장김치를 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흐뭇한 마음이 든다”며 “이 텃밭이 아파트 주민이 한데 어울러질 수 있는 원동력이라 힘은 들지만 기쁘게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옥상 한 켠에 있는 창고에는 최근 수확한 고추가 박스에 보관돼 있다. 크기는 일정하고 매끈한 광채가 흘러 한눈에 봐도 전문 농사꾼이 키운 것 마냥 탐스럽다. 이 텃밭을 종합 관리하는 홍종범 SH벽산2단지 임차인대표회의 회장은 “조성 초기만 해도 재배에 드는 물값을 (주민들에게) 왜 떠넘기느냐고 항의도 받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텃밭을) 자식처럼 아껴주고 걱정해준다”며 “지난 10년간 다투던 주민들도 임대 주민들이 나서서 이 텃밭으로 소외계층을 돕다 보니 닫혔던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고 말했다.

벽산아파트는 2000년에 조성됐다. 서울 관악산 자락에 위치한 판자촌 밀집지역이 5,564가구의 대규모 아파트타운으로 급변한 것. 당시 이 곳에 살던 철거민과 장애인, 탈북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2단지에 영구임대아파트 564가구를 조성했다.

하지만 단지 내 5m남짓한 길 양쪽으로 임대아파트와 수억원짜리 분양아파트가 마주보다 보니 자연스레 주민간 다툼으로 이어졌다. 다른 단지 주민들은 “판자촌에서 살던 놈들”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일쑤였고, 쓰레기 종량제 실시 이전까진 “돈 없어 쓰레기까지 남의 단지에 몰래 버리냐”며 아파트 관리소에 항의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소외됐다는 생각에 더욱 극하게 맞붙다 보니 많게는 하루에 15건 이상 경찰이 출동한 날도 있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심지어 단지 내 오가는 길을 막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금천구 관계자는 “구청의 중재로 단지 내 출입을 며칠 만에 허용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1년 4층 높이의 2단지 관리동 옥상에 텃밭이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텃밭은 자연스레 주민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다. 이 텃밭 조성사업을 고안한 신명철 금천구 커뮤니티 전문가는 “마을을 통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공동으로 힘을 모아 농작물 등을 생산할 수 있는 텃밭 가꾸기였다”며 “녹지공간도 조성할 수 있는데다, 함께 생산한 농작물을 소외계층에게 기증하다 보면 마을 품격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예상보다 결과는 훨씬 좋았다. 구의 설득도 물론 작용했지만 10년 넘게 이어진 주민 갈등을 이번 기회에 해소하자는 주민들의 염원이 무엇보다도 컸다. 2단지는 임차인대표회의를 구성했고, 다른 단지에선 부녀회를 중심으로 봉사단을 꾸렸다. 시와 구는 텃밭을 조성할 수 있도록 깊이 25~30㎝ 되는 상자 80여개와 사업비 500만원을 지원했다. 그 해 옥상텃밭에서 김장배추 500포기를 수확해 시흥동 내 기초생활수급자와 고아원, 노인정, 장애인 시설에 김장을 담아 기부했다. 홍 회장은 “텃밭을 가꾸면서 임대 주민에게 가졌던 선입견은 사라지고, 돈보다는 서로를 위하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민들끼리 마음을 열다 보니 농사는 매년 풍작이었다. 재작년 여름에는 40여일간 해가 들지 않고 비도 오지 않다 보니 김장철 배추는 ‘금추’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귀했다. 포기당 만원을 육박할 정도였다. 하지만 ‘2단지표 배추’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모종을 자식처럼 돌보는 주민들 정성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 해 150가구에 각 7㎏씩 김장배추를 전달했다. 작년에는 농사 규모는 더욱 늘어나 180가구에 각 10㎏씩 김장배추를 줄 수 있었다. 규모가 매년 커지다 보니 구 등에서 지원하는 비용 500만원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공동으로 모으는 폐지 판매 대금으로 부족금을 충당키로 했다. 작년에는 330만원 정도를 보탰다. 봉사활동을 2년째 이어오고 있는 서광모(69)씨는 “비록 다른 단지에 살지만 임대 주민들은 스스로 사업비를 낼 정도로 열성적으로 텃밭을 조성하고 있어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벽산아파트 텃밭은 금천구의 자랑거리가 됐다. 서울시에서 지난해 11월 열린 ‘2013년 공동주택 공동체활성화사업 우수사례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을 정도다. 시 관계자는 “도시농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녹색생명 도시를 열심히 조성한 동시에 마을 화합까지 이뤄내 25개 자치구 170여개 사업 가운데 으뜸으로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이젠 주민들은 스스럼없이 옥상 텃밭을 공원처럼 이용한다. 도시락을 싸 소풍 나오기도 하고 상추가 한창일 땐 일손을 거들고 상추를 얻기도 한다. 자연스레 옥상은 이웃 간 대화의 장이 됐다. 1단지 한 주민은 “짬이 나는 주말이면 이 곳에 나와 고추도 따고, 물도 주며 형님, 아우님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주중에 쌓인 피로가 금세 풀린다”고 말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김명선 인턴기자(고려대 철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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