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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집시들의 땅도 아니건만...우린 왜 남쪽나라를 꿈꿔야 하는가

입력
2014.08.2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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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밑그림과 물감 짙게 덧칠한 큰 그림

가족과 세상에 다른 모습 보였지만 어차피 남쪽나라는 갈 수 없는 나라

진실을 외면하는 나라에서 떠나간 세월호의 어린 넋들이라도

따뜻한 그곳에 갔음을 믿고 싶다

제주이중섭미술관에는 한때 ‘길 떠나는 가족’의 복제화가 걸려 있었다. 관광객인 내가 그 그림의 세부를 살피고 있을 때 문득 내 목구멍으로 ‘평택’이라는 도시 이름이 올라왔다. 나는 옛일을 더듬어보았지만 이중섭과 평택과 나를 연결시켜 줄만한 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던 일인데, 지난봄에 평택시립도서관의 강연 요청을 받고 하룻밤을 자고 나니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아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대학입학시험의 합격 여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평택으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 중학교 동기의 가족이 어떤 이유로 갑자기 평택에 이주하여 거의 숨어 살고 있었다. 친구는 아내를 집에 들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한겨울 볕바른 골목길의 담벼락에 친구와 함께 기대서서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다고, 첫 애를 낳을 무렵 아내는 말했다. 그때 아내도 아내의 친구도 열여덟 살, 삶의 앞길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모르는 처녀들이었다. 이중섭의 그림이 주는 비통한 충격과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슬픔이 한데 겹쳐 저 엉뚱한 ‘평택’을 만들어냈던 것이 틀림없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이 사업에 실패하여 살던 곳을 남몰래 떠나야 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것은 물론 아니다. 이중섭은 같은 그림을 두 번 그렸다. 그는 1955년 1월의 개인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그 출품작 ‘길 떠나는 가족’의 밑그림이 되는 그림을 종이에 그려 일본에 거주하는 가족에게 보냈다. 그림 밑에는 큰 아들 태현이 읽을 편지를 썼다. “나의 태현군, 잘 있지요? 학교의 친구들도 잘 있습니까? 아빠도 건강하게 전람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빠가 오늘… ‘엄마, 태성 군, 태현 군이 소달구지를 타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함께 가는 것을 그렸습니다. 소 군 위에는 구름입니다.’ 그럼 몸 성히. 아빠 중섭.” 편지는 ‘아빠’까지 일어로 쓰고, ‘중섭’만 그림의 서명에서처럼 한글로 풀어 썼다. 섬세한 화가는 그림의 주제를 표현하는 글과 안부 글을 구분하기 위해 인용부호를 쓰기도 했다.

소가 끄는 짐수레 위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다. 웃옷을 벗은 채 젖가슴을 드러낸 엄마는 두 팔을 양쪽으로 뻗어 수레의 앞뒤에 탄 두 아들의 다리와 등을 만지고 있다. 발가벗은 앞의 아이는 소의 꼬리에 꽃을 매달려고 애쓰고, 웃옷만 입고 수레의 뒤편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는 두 손으로 비둘기를 놓아 보낸다. 세 사람의 시선은 각기 방향이 다르다. 꽃을 든 아들은 수레가 가는 방향을, 곧 앞길을 바라보고, 새를 날려 보내는 아이는 반대로 뒤쪽을 향해 살던 곳의 하늘을 쳐다본다. 엄마의 시선은 ‘우리는 이렇게 떠난다’고 말하려는 듯, 그림을 보는 우리들을 마주한다. 힘차게 한 쪽 앞발을 들어 올린 수소의 고삐를 거머쥐고 뒤돌아선 아버지는 그 얼굴이 정면에서 보일 정도로 고개를 한껏 젖혀 하늘을 바라본다. 높이 들어 올린 한 쪽 손에 구름이 잡힐 듯하지만, 당초문을 닮은 그 신기한 구름은 얼마나 아득한 높이에 떠 있을 것인가. 수레에도 꽃이 흩어져 있고 아이의 손에도 꽃이 있고 수소의 등과 목에도 꽃줄이 드리워져 있어, 그림은 전체적으로 화사하지만, 길 떠나는 가족은 행복할까.

전시회에 나왔던 큰 그림은 같은 배경에 같은 인물들을 같은 구도로 그렸지만, 물감이 짙게 깔려, 연필로 윤곽을 그렸던 편지의 작은 그림보다 덜 선명하고 덜 화사하다.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새벽하늘에는 당초문의 구름 대신 붉은 구름이 길게 떠 있다. 지면의 굴곡이 더 심하고 수레의 바퀴는 흙 속에 약간 파묻혀 있다. 엄마는 웃옷을 입어 젖가슴이 보이지 않는다. (식구들끼리 볼 그림과 세간에 내놓을 그림이 그렇게 다른 것은 화가가 세상에 기대하는 것이 그만큼 작았다는 뜻도 된다.) 인물들의 얼굴에서는 거친 붓질 탓에 표정이 숨겨졌고 흰색으로 찍은 눈만 보인다. 시선의 방향은 두 그림이 같다. 두 아이는 여전히 수레의 앞과 뒤를 바라보지만 절규하듯 한 팔을 들어 올린 아버지는 내내 하늘을 바라본다. 화사한 그림도 덜 화사한 그림도, 그림은 슬프다. 꽃으로 장식한 수레는 상여일 뿐이라고까지는 말하지 말자. “따뜻한 남쪽나라”는 갈 수 없는 나라이며, 따라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다. 가족은 길을 떠나지만 가는 곳은 없다.

나는 이중섭이 이 그림을 구상할 때도, 제목을 결정할 때도, 보들레르의 시 ‘길 떠나는 집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눈동자 이글거리는 점쟁이 피붙이가

어제 길을 떠났다, 등짝에 어린 것들

둘러업고, 또는 저 자랑스러운 배고픔에

늘 마련된 보물, 늘어진 젖꼭지를 내맡기고.

사내들은 번쩍이는 무기를 높이 들고,

제 식구들이 웅크린 마차를 따라 걸어가며,

있지도 않는 환영을 쫓는 서글픈 아쉬움에

무거워지는 눈으로 하늘을 더듬는다.

모래 굴방 구석에서는 귀뚜라미가

지나가는 그들을 보고 두 배로 노래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키벨레는 이 길손들 앞길에,

녹음을 북돋아, 바위에서 샘물 솟고

사막에 꽃피게 하니, 그들에게 열린 것은

컴컴한 미래의 허물없는 왕국.

먼 길 떠나는 “점쟁이 피붙이”는 물론 집시 족속을 뜻한다. 타로 카드나 별점 등을 통한 미래의 예언은 그들의 중요한 수입원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운명을 다 알 수는 없고, 알더라도 그것을 행운으로 바꿀 수는 없어서, 그들의 어린 것들은 늘 자랑이나 하듯 배고픔을 호소하며 칭얼댄다. 그들이 번쩍거리는 무기를 높이 들고 다니는 것도 국적도 없는 그들의 앞길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점성술사인 그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내내 훑어보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의 환영일 뿐이고, 그 환영마저도 그들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협조하는 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래 구덩이에 사는 귀뚜라미가 그들을 위해 노랫소리를 드높이고, 들판과 초목을 관장하는 대지의 모신 키벨레가 그들을 위해 숲을 우거지게 하고, 바위에서도 샘물이 솟게 하고, 사막에서도 꽃이 피게 한다. 얼마나 얄궂은 협력인가. 귀뚜라미의 노래가 아무리 맑다 한들 그들이 가는 길에서 돌멩이 하나도 치워주지 못한다. 키벨레 여신의 조력은 그들을 결국 숲에서 잠들게 하고, 샘물로 배를 채우게 하고, 사막을 헤매게 한다. 그들이 점치는 자신들의 운명은 “컴컴한 미래”, 다시 말해서 알 수 없는 미래, 행운보다는 고난이 더 많을 미래이지만, 그 미래야말로 그들에게는 가장 낯익고 다정해서 “허물없는 왕국”이다. 보들레르에게는 그들이 예술가들의 표상이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낙관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을 수밖에 없는 슬픈 낙관주의자들이다.

집시들은 처음부터 나라가 없기에 늘 없는 나라로 간다. 제 나라에서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을 뿐더러 가난과 몰이해와 고독의 한계에까지 밀렸던 이중섭에게는 “따뜻한 남쪽나라”밖에 다른 나라가 없었다. ‘길 떠나는 집시’의 가장과 ‘길 떠나는 가족’의 가장은 눈과 손으로 하늘을 더듬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거기 없다.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한 2014년 4월 16일 이후 이 나라의 사람들은 나라의 하늘이 무너진 것을 염려해야 했다. 몇 백 명의 사람들과 거의 같은 수의 죽음을 태우고 배가 떠날 때, 나라는 이미 예정된 것이나 같은 그 참사를 짐작도 못했거나 방조했고, 물에 빠진 사람들이 죽음과 마지막 싸움을 벌일 때 나라는 손을 놓고 있거나 헛손질을 했다. 나라의 높은 사람들이 이 국가적 참사를 교통사고라고 불렀으니 그들도 나라가 없어졌음을 내심 고백했던 것이나 같다. 사람들이 모두 비탄에 빠졌지만 나라는 꿈쩍하는 척만 하다 이제는 그것도 그만두었다. 지금 세월호 희생자의 학부모들은 수만 명 동조자들과 함께 단식 농성을 하며, 청와대 앞에 모여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 한다. 이 나라는 나라 없는 집시들의 땅이 아니다. 이 나라가 “컴컴한 미래”를 “허물없는 왕국”으로 여겨야 할 사람들의 땅이 될 수는 없다. 단식하는 학부모들은 저 아이들의 희생으로 나라가 나라로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고 있다. 그 많은 아이들이 비명에 죽었으면, 그들이 왜 죽었는지 알려고 먼저 안달해야 할 것은 나라이다. 안달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알려는 노력 앞에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나라가 나라이다. 학부모들은 이 나라가 아직은 ‘나라’이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저 아이들이 그 넋이라도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 있다고 믿고 싶지만, 제 나라가 있을 때만 따뜻한 남쪽나라도 있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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