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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싫고… 학교에 와도 칠판 수학공식이 외계어로 보여"

입력
2014.08.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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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돌봄 부족할수록 학습 부진… 학력 미달 학생 30%가 결손가정

진도 떨어지면 학교서도 포기… 스트레스 등도 학습 부진의 원인

“중학생이 되면 가출할거에요.” 초등 4학년 박지민(가명ㆍ11)군은 학년 초 학교에서 치른 기초ㆍ교과학습 진단평가에서 전교 꼴찌를 했다. 이런 바닥 성적은 지민이가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였다. 서울 강북의 월세 반지하방에서 사는 지민이네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식사를 거를 때가 많다. 밥을 먹어도 반찬은 간장, 김 정도다. 또래보다 키도 작다. 집에 있는 것을 싫어해 벌써 가출을 꿈꾸고 있다.

부모의 돌봄 부족할 때 학습부진 낳아

아이들이 제대로 된 학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부모의 지원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빈곤과 저학력 등으로 부모가 자녀를 지원하지 못하면 학습부진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유아기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학습에 대한 준비도, 동기도 없는 채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학습부진에 빠져든다.

올해 2월 경기도교육연구원이 발표한 ‘학습부진 학생 실태와 지원방안’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부 시간과 독서량이 같을 때 부모의 가구소득ㆍ학력 등 사회경제적 배경이 취약한 가정의 자녀가 국어ㆍ영어ㆍ수학 성적 하위 10%에 머물 확률은 1.3~1.8배 더 높았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는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로 기초학력 미달 판정을 받은 학생의 20~30%는 결손가정의 자녀”라고 말했다.

전문직 부모를 둔 3세 아이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 가정의 아동보다 언어습득률이 2배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여기에 사교육까지 더해지면 둘 간의 교육격차는 더 커지고, 성인이 됐을 때 소득격차로 이어진다.

부모의 방임에서 나아가 학대에 시달리는 아이들도 공부보다는 비행에 빠지기 쉽다. 서울 양천구의 한 초교에서 ‘싸움꾼’으로 통하는 정성호(가명ㆍ13)군은 교과 단원이 끝날 때마다 보는 단원 평가를 통과하지 못해 매번 나머지 공부를 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갓난아기 때부터 할아버지 댁에서 자란 성호는 4년 전 어머니의 재혼으로 아버지가 생겼다. 아버지는 관심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휘둘렀다. 숙제를 하지 않았거나 일기를 쓰지 않은 채 TV를 보고 있으면 아버지는 화를 내며 분이 풀릴 때까지 성호를 때렸다.

쌓이면 헤어나지 못하는 학습결손

사회경제적 환경 외에 학생들의 정신·심리적 요인도 크다. 우울증, 심리적 장애,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학습부진이 적지 않다.

경기 평택의 고교생 김태민(가명ㆍ18)군은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린 끝에 공부에 손을 놨다. 중학교 진학하면서 초교 때 하던 레슬링을 그만 뒀는데, 이후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아 스트레스를 겪다 끝내 포기한 것이다. 지금은 졸업장을 딸 생각으로만 학교를 다닌다. 그는 “수업에 집중을 하려고 해도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칠판에 적힌 영어와 수학공식이 외계어처럼 보였다”고 했다. 누적된 학습결손 끝에 학습부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경우다.

태민군처럼 학습 결손으로 뒤처지기 시작한 학생들을 좀 더 일찍 학교에서 찾아내 원인을 해결하는 노력이 절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교사들은 정해진 진도를 주어진 시간 안에 맞추기에 바쁘다. 방치된 상태에서 학교 진도와 격차가 벌어지면 학생들은 아예 포기하고 만다.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습부진아로 전락하고, 한 번 학습부진아가 되면 쉽게 벗어나기 힘든 악순환이다.

전문가들은 학생들이 학교에 입학하거나 새 학기가 시작될 때 학습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경인교대 이대식 교수는 “학습부진은 금세 해결되지 않는데 정규 수업은 계속 진행되다 보니 학습부진이 누적되고, 악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다양한 학습부진 원인 고려 없어

지난해 경기도교육연구원이 발표한 ‘경기도 학습부진 학생 실태와 지원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학습부진의 원인은 10가지가 꼽힌다. 누적된 학습결손, 심리적 지원 결여, 학습의지 부족, 학습동기 결여, 공부방법 부적절, 심리 정서 불안정, 수업의 질 미흡, 교과별 필수 기본학습기능 미달,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같은 신경심리학적 문제, 복합형 등이다.

이러한 요인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해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를 치른 중학생 59만9,68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효과적인 공부법에 대해 잘 안다’고 답한 우수학력 학생은 84.5%에 달했으나 기초학력미달학생 중에선 30%에 불과했다. ‘수업에 집중하는 편인가’ 하는 물음에는 우수학력 학생 94%가 ‘그렇다(51.2%)’ ‘매우 그렇다(42.8%)’고 답한데 반해 기초학력미달학생은 각각 29.8%, 4%로 33.8%에 그쳤다.

교육을바꾸는사람들 이찬승 대표는 “사회경제적요인 등으로 인한 개인별 수준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학습량을 같은 시간에 소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우리의 교육시스템이 학습부진아를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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