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지 달리 학교·교육청 평가지표 활용, 과도한 문제풀이 등 교실에 편법 양산
학력 미달 비율 높은 학교 지원도 시험 성적 향상에 집착 '1회성 처방'
우리 학교 현장에 학습부진아에 대한 정책이 없는 게 아니다. 교육부는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라는 전국 중3, 고2 대상의 시험을 실시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학력이 처지는 학습부진 학생들을 선별한다. 하지만 이렇게 선별된 기초학력 미달 학생을 각별히 지도하고 성장시키는 정책 실행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일선 학교에선 어떻게든 기초학력 미달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편법만 동원하고 있다.
“학력미달자 걸리지만 말자” 주객 전도
충북의 한 초등학교는 2012년 성취도평가를 앞두고 학생들 성적에 따라 우열반을 구성해 정규 수업이 끝난 뒤 저녁 8시까지 야간자습을 시켰다. 수업 시간에도 진도를 나가는 대신 성취도평가에 대비하기 위한 암기식 문제풀이에 집중했다. 이 지역의 한 교사는 “학생들이 책 읽는 모습을 본 교장이 ‘시험이 코앞인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사치스럽게 독서를 하고 있냐’고 꾸짖기도 했다”고 말했다.
인천의 한 중학교에서는 성취도평가를 준비하기 위해 교내에서 치른 모의고사와, 실제 성취도평가의 점수를 비교해 성적이 오른 학생 50명에게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을 나눠주는 포상을 했다. 시험 과목 성적이 모두 1등급인 학생에겐 문화상품권 3만원을,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한 명도 없는 반에는 현금 20만원을 시상했다. 교육청 장학사는 시험 준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관할 지역의 학교를 돌며 교장ㆍ교사 면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학교들이 성취도평가 결과에 연연하는 이유는 학습부진아를 구제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잊은 채 학교와 지역 교육청에 대한 평가 지표로 전용된 탓이다. 올해 성취도평가는 지난 6월 24일 전국 중3ㆍ고2 학생 109만명이 참여했다. 교육부는 성취도평가 성적이 높거나 기초학력 미달학생 수의 감소율이 높은 순으로 시ㆍ도교육청에 특별교부금을 지원하고, 교육청 역시 시험결과에 따라 학교에 성과급을 차등 지급한다. 교육부가 공개한 ‘2010~2012년 시도교육청 평가에 따른 특별교부금 배부 현황’을 보면 3년간 3,663억원이 교육청에 지원됐으며, 가장 많은 교부금을 탄 경북(365억9,713만원)과 제일 적게 지원받은 서울(89억9,414만원)의 금액 차이는 4배에 달했다. 학교들이 성취도평가에서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나오지 않도록 과도한 문제풀이를 시키고, 교육청들도 이런 학교를 독려하는 이유다. 성취도평가의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전교조 조사에 따르면 2012년 성취도평가를 치른 전국 355개 초ㆍ중ㆍ고교 가운데 143곳(40.3%)이 시험 준비과정 중 0교시 특별수업 등 교육 파행이 있었다고 답했다. 성취도 평가 결과가 학교별로 공개되기 때문에 사교육업체들이 전국ㆍ지역 단위의 학교 순위를 매기는 등 학교 서열화의 지표로 악용되기도 한다. 서울의 한 고교 교사는 “정부의 지원, 학교 평판과 직접 연결돼 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학습부진아 지원은 땜질식 처방
교육부는 기초학력 미달 학생의 비율이 높은 학교를 ‘학력향상형 창의경영학교’(2,300여곳)로 정해 예산 지원을 하고 있다. 돌봄이 부족하거나 정서ㆍ행동 장애 등 복합적 요인으로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통합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두드림학교(600곳)도 운영하고 있다. 일부 교육청은 기초학력 미달 학생 중 학교 안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학생을 위한 학습종합클리닉센터를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학습부진아 지원조차 철저히 실전연습, 문제풀이 등 일회성 교육에 맞춰져 있다. 경인교대 이대식 교수는 “문제풀이를 계속 시키니까 성적이 반짝 오를 수는 있지만 결국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학생들이 많다”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전형적인 땜질식 처방”이라고 말했다. 가정불화ㆍ빈곤 등 학습부진의 다양한 발생원인은 고려하지 않은 채 시험성적 향상 등 결과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학습부진의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수업 시간이 곤욕인 학생들에게 방과 후 또 다시 문제풀이 중심의 보충수업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던 학습의지까지 꺾어버린다.
때문에 통계로 드러나는 기초학력미달 비율은 2010년 4.2%에서 지난해 3.4%로 감소했지만 실제로 학습부진이 해결됐다고 보는 시각은 드물다. 가톨릭대 성기선 교수는 “학습부진 문제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교사단체인 좋은교사운동이 올해 4월 발표한 ‘학교 현장 학습부진 지도 실태조사’에서 전국 초ㆍ중ㆍ고교 교사 518명 중 96%는 ‘학습부진 학생은 학년이 바뀌어도 학습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답했다.
획일화된 기준ㆍ낙인 효과도 우려
학습부진에 대한 평가가 국어ㆍ영어ㆍ수학 등 주요 과목 중심으로 실시되는 것도 문제다. 서울 강일고 김환섭 교장은 “실용음악을 전공하려는 학생에게 음악은 주당 1시간만 듣게 하고, 국어ㆍ수학ㆍ영어 중심으로 가르치면서 ‘너는 기초학력이 부진하니까 방과후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게 일선 학교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진로와 적성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획일화된 기준에 맞춘 성취도평가가 과연 적절한 것이냐는 지적이다.
그러다 보니 ‘학습부진아’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낙인효과만 낳는다. 경기도교육연구원 백병부 연구위원은 “학생들이 낙인에서 벗어나 교사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며 “도움이 필요한 학생을 지원한다는 복지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배움이 느린 아이’ ‘배움찬찬이’ ‘노력형 학습자’ 등으로 바꿔 부르고, 학습부진아 판별 목적이 ‘정서적인 어려움이 있는 학생에 대한 학습지원’이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목적 잃은 성취도평가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기선 교수는 “경쟁위주의 학교 교육은 자살, 따돌림 같은 여러 병폐를 불러일으킨다. 0교시 수업, 강제된 자율학습 등 각종 부작용을 안고 있는 성취도 평가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한 ‘2012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학교생활이 행복하다’고 답한 한국 학생 응답률은 60%로 조사대상 65개국 중 꼴찌였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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