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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무기 시대를 연 비극의 마지막 엑스트라

입력
2014.08.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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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비밀작전 항법 승무원으로 징발돼 명령 따라 죽음의 버섯구름 피워

예편 뒤 수많은 강연·인터뷰

위대한 거짓말 여전히 진행 중

"원폭 없었다면 더 많은 희생 전쟁 끝내... 후회는 없다"

1945년 종전 직후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과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둘러본 테오도르 반 커크는 폐허가 된 나가사키의 거리에서 한 일본군 부상병이 자신의 집을 찾아 헤매던 모습에서 어떤 슬픔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EPA연합뉴스
1945년 종전 직후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과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둘러본 테오도르 반 커크는 폐허가 된 나가사키의 거리에서 한 일본군 부상병이 자신의 집을 찾아 헤매던 모습에서 어떤 슬픔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EPA연합뉴스
45년 8월6일 오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작전을 수행하고 온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이 군 수뇌부에 작전 경과를 보고하는 장면. 왼쪽 아래 테이블 모서리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가 테로도르 반 커크다. AP연합뉴스
45년 8월6일 오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작전을 수행하고 온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이 군 수뇌부에 작전 경과를 보고하는 장면. 왼쪽 아래 테이블 모서리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가 테로도르 반 커크다. AP연합뉴스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니트로글리세린을 인류의 전쟁을 끝낼 발명품이라 여겼다. 1915년 4월, 제1차 세계대전 유럽 서부전선에서 처음 쓰인 염소가스는 독일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조제했다. 그는 “독가스로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면, 그건 무수한 목숨을 살리는 한 방법”이라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의 아내 클라라는 하버가 전선으로 떠난 그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5년 8월 10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라디오로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전쟁의 고통을 빨리 끝내기 위해, 수천 수만 젊은 미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 폭탄(원자탄)을 사용했습니다.”

유사 이래 모든 전쟁이 ‘살(리)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인류는 아직 그 명분의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적어도 보편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알면서도 속고 스스로도 속이는 ‘위대한 거짓말’ 위에서 지금도 전쟁은 벌어지고 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 최대의 살상무기인 원자탄을 투하한 B-29 슈퍼포트리스의 승무원 12명도 생애 내내,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자신들의 역할을 자랑스러워했다. 항법사 커크는 2010년 8월 영국 ‘미러’지 인터뷰에서 “나는 조금도 사죄할 마음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다. (…) 만일 우리가 그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 본토를 공격했을 것이고, 쌍방의 희생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B-29 승무원 중 마지막 생존자 테오도르 반 커크(Theodore Van Kirk)가 93세를 일기로 7월 28일 숨졌다.

커크의 말은, 당시 전선에 있던 군인이라면, 또 그들의 가족이라면 토 달기 힘든 진실일 것이다. 불과 넉 달 전인 45년 4월 오키나와 상륙전 희생자만도 민간인 포함 약 11만 명(연합군 1만2,513명 )에 달했다. 미국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호가 B-29가 기다리는 티니안 섬에 원자탄을 실어 나른 지 이틀 뒤인 7월 28일 도쿄 어전회의는 연합국 수뇌들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원자탄 투하 소식이 전해진 뒤 오키나와 주둔군이 종전 기대에 들떠 공중에 쏘아댄 축포의 유탄으로만 7명이 숨졌다.(다이애나 프레스턴,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한 영국인 군의관은 프레스턴에게 “우리는 피낭 섬을 공격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다. 누구도 희생자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짐을 다시 푸는 일은 달콤했다.” 스물한 살의 한 미군 소위는 “우리는 안도감과 기쁨으로 펑펑 울었다. 살 수 있게 됐다.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네이팜탄이 처음 쓰인 그 해 3월 도쿄 공습 희생자만도 10만여 명이었다. 그러니 히로시마의 희생자 14만 명은, 종결적 희생으로 친다면 많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일본 핵의학 선구자로 제국 일본의 원자탄 제조에도 관여했던 다케미 다로(武見太郞)조차 훗날 “만일 원폭공격이 없었더라면 나라 전체가 희생될 수도 있었음을 고려할 때, 그 폭탄이 일본을 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같은 책 540쪽)

하지만 달리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소련군은 원폭투하 6시간 뒤 대일 선전포고를 했지만, 그건 예정을 불과 일주일 앞당긴 거였다. 일본 육군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천황 히로히토는 소련에 종전협상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진보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미국의 원폭은 도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전혀 정당하지 않으며, 전후 소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고 비판했다(냉전과 대학, ‘냉전시대 역사의 정치학: 억압과 저항)

커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원자탄이라는 궁극무기의 시대를 연 조연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리고, 원자탄 투하를 둘러싼 저 도덕적 군사적 질문들을 실질적으로 감당했어야 할 이들은 무수히 많다. 우선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 이후의 물리학자들, 특히 핵물리학의 발전과 원자탄 개발을 주도했던 오펜하이머, 하이젠베르크, 페르미, 텔러, 리처드 파인만 등 현대물리학의 영웅들과 관련 기술자들이 있을 것이다. 루즈벨트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불을 지핀 아인슈타인도-훗날 자신은 ‘우편함 노릇’을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그 중 하나다. 무엇보다 루즈벨트와 처칠, 또 원자탄을 선취하기 위해 죽음의 레이스를 펼쳤던 히틀러와 스탈린, 히로히토가 있다. 그들에 대자면, 군인으로서 명령에 충실히 따랐던 육군 항공대 소속 소령 커크를 비롯한 B-29 승무원들은 저 참담한 사건의 엑스트라였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부문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당시 견해는 과학자 일반의 윤리의식일지 모른다. 그는 45년 로스앨러모스를 떠나며 “과학자라면, 세계의 운행방식을 찾아내는 일, 실재하는 것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을 널리 인류에게 돌려주고 그것에 대한 지식과 가치에 따라 그 힘을 다루는 일이 좋은 일이란 걸 알 것이다”라고 했다. 프린스턴대로 돌아간 그는 하지만 훗날 수소폭탄 제조 계획에 반대했고, 50년대 매카시 광풍에 휩쓸려 의회청문회에 섰고, 비밀정보 접근허가권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67년 후두암으로 숨졌다.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독일 과학자들의 원자탄 선제 개발을 우려한 레오 실라르드 등의 요청에 동조, 우라늄의 중요성과 원자탄의 실현가능성을 알리는 두 페이지 편지를 썼던 아인슈타인은 훗날 자신의 비서에게 “만일 독일이 원자폭탄을 못 만들 거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야. 손가락 하나도 말이야!”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55년 숨졌다.

폴란드 출신의 핵과학자 조지프 로트블랫(2005년 사망)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과학자 가운데 양심에 따라 로스앨러모스를 떠난 유일한 인물이다. 미군 정보당국은 그에게 소련의 첩자라는 혐의를 씌워 방대한 조사를 벌인 뒤에야 그를 놓아줬다. 아인슈타인, 버틀란트 러셀 등과 반핵운동단체 ‘퍼그워시’를 만들어 활동한 공로로 95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로트블렛은 “핵무기는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이다. 군인과 민간인, 침략자나 시민, 현 세대와 다음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육한다”고 수상 연설했다.

프레스턴의 책에는 처칠의 인간적 고뇌도 각주로 소개돼있다. 43년 독일 함부르크 야간공습 장면의 기록필름을 본 뒤 그가 울면서 “이런 짓을 해야 할 정도로 우리가 짐승들이란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트루먼 역시 플루토늄탄 성능실험(일명 트리니티 프로젝트)이 성공한 날 이런 일기를 남겼다. “나는 모종의 평화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기계가 인간을 몇 세기나 앞서 있다는 게 두렵다. 인간이 기계를 따라잡을 때면, 아마 인간이 있을 이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흘려 쓴 글씨 탓에 ‘인간(mortals)’이냐 ‘도덕(morals)’이냐 를 두고 아직도 논란이 있다고 한다.

B-29 슈퍼포트리스의 조종사이자 지휘관은 29살의 폴 티베츠 중령이었다. 38년 텍사스 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B-17 플라잉포트리스 편대를 이끈 미 육군항공대 최고의 조종사이자 509혼성편대 편대장이었다. 그는 원폭 투하의 비밀 임무를 받은 뒤 B-29 개조를 비롯한 작전 전권을 위임 받아 승무원을 선발했다. 폭격수 토머스 피어비 소령, 항법사 쿼크, 미포수 밥 캐론 하사…. 티베츠는 작전 이틀 전 브리핑에서조차 ‘원자탄’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고, 다만 “지금까지의 폭탄은 우리가 투하할 폭탄에 비하면 작은 토마토 수준일 것”이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유사시 부하들에게 지급할 청산가리 알약을 품고 있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라늄탄 ‘리틀보이’(원래는 트루먼을 빗댄 ‘씬 맨(Thin Man)’이었으나 제조 과정에서 길이가 짧아지면서 리틀보이가 됐다고 한다. 나가사키의 플루토늄탄은 처칠에 빗대 ‘팻 맨(fat man)’이라 불렸다)는 무게가 4톤이었다. 그 무게를 감당하며 일본군의 대공포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 있는 3만피트 이상 고도에서 속도를 높이기 위해 티베츠는 후미 기관포를 제외한 모든 무기와 장갑판을 제거했다. 무사 귀환을 위해선 폭탄 투하 직후 최대한 빨리 위험반경을 벗어나야 했다. 3만1,000피트 상공에서 투하된 폭탄이 폭발고도인 1,890피트까지 떨어지는 시간 43초에 충격파가 기체에 도달하는 데 걸릴 시간 40초를 더해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1분23초. B-29가 최소 안전거리 8마일 바깥까지 피하려면 약 2분이 필요했다. 살기 위해 그들은 항공기가 가장 빠른 순간항속을 낼 수 있는 급강하회전 훈련을 거듭했다.

그 사이 미국 워싱턴에서는 표적 선정작업이 한창이었다. 일본군의 항전의지가 결정적으로 꺾일 만한 곳, 군사도시일 것, 원자탄의 위력 산정을 위해 공습 피해가 없는 도시일 것. 먼저 다섯 곳이 선정됐다. 일본의 상징적 수도 교토, 주요 병참기지인 히로시마,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요코하마, 군수기지인 고쿠라, 북서부 최대 항구인 니가타. 5월 펜타곤 회합에서는 그 가운데 교토와 히로시마 니가타 세 곳이 뽑혔다. 교토는 전후 일본인들의 심리적 저항감 등이 우려돼 표적에서 막판에 제외됨으로써, 재래식 폭격도 원자탄도 모면하는 행운의 도시가 됐다. 대신 나가사키가 불운을 맞았다.

8월 6일 새벽 2시30분, 일본 정남방 1,300마일 해상의 산호섬 티니안. 티베츠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붙인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출격했다. 앞서 3대의 B-29는 시계 폭격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임무를 띠고 히로시마와 니가타 나가사키로 먼저 출격했고, 다른 한 대는 이오지마에 착륙, ‘에놀라 게이’의 고장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히로시마 시각 오전 7시 직후, 에놀라 게이로 암호 전문이 온다. ‘히로시마 시계 양호’. 표적은 1차 표적이던 히로시마로 결정됐다. 오전 8시 15분. 티베츠의 폭격항정이 시작되고, 커크와 폭격수 탐 피어비가 눈짓으로 사인을 교환하자마자 투하구가 열렸고, 에놀라 게이는 155도 급강하회전을 시작했다. 43초 뒤 히로시마는 지옥불에 휩싸였다.

밥 캐론은 “코니아일랜드에서 사이클론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얼마 뒤 기체는 전봇대에 충돌한 듯한 충격파에 휩싸인다. 그리고 특수 제작된 고글 너머로 비친 ‘아름다울 정도로 끔찍한’ 거대한 버섯구름. 훗날 커크는 “순식간에 도시 전체가 펄펄 끓는 검은 타르의 도가니로 변한 것 같았다”고 말했지만, 당시 그를 포함한 전 대원의 첫 감상은 “다행이다” “안심이다”는 거였다.(가디언, 2014.7.30) 그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임무의 중압감이었다. 커크는 라는 책(2000)의 저자 밥 그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그 상공에서 세상 누구도 아직 모르는 일을 보게 됐다면 당신의 첫 감흥도 이제 전쟁이 끝났구나 하는 안도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커크는 1921년 2월 27일 펜실베니아 노스엄블랜드에서 태어났다. 서스케하나 대학을 1년 다닌 뒤 41년 10월 육군항공대에 입대한 그는 항법사로서 티베츠와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원폭 투하의 전공으로 은성무공훈장과 공군수훈십자훈장을 탔다. 46년 소령으로 예편한 그는 버크넬 대학에서 화학공학 석사 학위를 땄고, 49년 듀퐁사에 입사해 35년간 기술과 마케팅 분야에서 일했다. 커크는 재직 중 또 퇴직 후 수많은 강연과 인터뷰를 했고 책도 썼는데, 그 활동이 자신들을 영예롭게 치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후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2007년 그는 자신의 항법일지를 경매에 내놔 35만8,500달러에 팔기도 했다.

‘미러’지 인터뷰에서 그는 ‘희대의 학살자’ 등 수많은 욕설과 협박 전화를 받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누구든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2005년 AP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들의 전쟁과 원자폭탄이 그 무엇도 완전히 끝내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며 그 무기들이 모두 사라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다. 두 생각은 물론 모순되지 않는다. 하지만 뉘앙스는 다르다. 그렇게 그도, 가끔은,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역사의 짐, 또 길고 어두웠던 그림자에 눈을 흘겼을지 모른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도덕과 전쟁을 하나의 문장 안에서 말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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