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평전
벤저민 양 지음ㆍ권기대 옮김
민음인ㆍ2004ㆍ411쪽ㆍ1만8,000원
지주 아버지 기대 덕 프랑스 유학
대장정 지나며 마오에게 경도, 경쟁자 린뱌오 죽자 "하느님이 보우"
골수 아닌 적당한 공산주의가 최고 권력자에 이른 비결로 지적
현대 중국의 설계자 덩샤오핑(1904~1997년)의 아버지 덩원밍은 농사와 수공을 업으로 삼은 쓰촨성의 지주였다. 그에 대한 동향 사람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범죄를 밥 먹듯 저지르며 주지육림에 뒹굴었던 불한당이자 불쌍한 농민들의 피땀을 빨아먹고 산 기생충 같은 잔인한 지주”라는 지독한 혹평이 따른다. “선량하고 근면했으며 남에게 동정을 베풀었고, 이웃 주민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랑 받았던 인물”이라는 더할 나위 없는 호평이 공존한다.
덩원밍에 대한 극단적인 평은 그의 아들 덩샤오핑(이하 덩)의 삶과 밀접하다. 덩이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정치적 비난을 받던 시절 홍위병들은 덩의 아버지를 ‘반동분자’로 규정했다. 덩이 정계에 복귀한 뒤 최고 실력자 자리에 오르자 1980년대 초 지방정부 관리들이 덩의 아버지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정치적 바람을 타고 이뤄지는 한 인물에 대한 해석은 진실과 거리가 멀기 마련이다. 22일 탄생 110주년을 맞아 중국 정부가 새삼 부각시키고 있는 덩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권력 강화를 위해 덩의 삶을 활용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덩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늘 존재해왔다. 덩이 중국에 자본주의를 이식한 인물이란 단순 평가가 대표적이다. 1985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덩을 ‘올해의 인물’로 선택하고 표지에 그를 실었다. 마오쩌둥의 급진적 공산주의를 등지고 중국을 자본주의로 이끌었다는 이유에서 찬사를 보냈다. 정작 열렬한 마오 추종자였던 덩의 마음은 불편했다. 타임의 해당 판은 중국에서 판매가 금지됐다.
덩이 사망한 1997년 출간된 ‘덩샤오핑 평전’은 덩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을 하기에 적당한 책이다. “기적과도 같은 업적을 이룬 순간은 거의 없었”던 정치인이자 “몇 가지 비범한 업적을 이룬 평범한 인간” 덩의 삶을 온기나 냉기를 더하지 않고 되짚는다.
저자는 소년시절과 청년기부터 덩의 삶을 자세히 복기한다. 덩이 태어나며 받은 이름은 셴성(先聖)이었다. 나중에 서당 선생의 추천으로 시셴(希賢)으로 바뀌었다. 자기랑 달리 큰아들이 좀 더 고상한 무언가를 이루길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이 반영됐다. 아버지의 소원은 아들의 고교진학과 프랑스 유학까지 뒷받침했다.
노동과 공부를 병행하려 했던 프랑스 ‘근공검학’(勤工儉學)은 덩의 일생을 결정했다. 덩은 프랑스의 젊은 중국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 1924년 저우언라이가 창간한 ‘적광’에서 일하며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저우 등 프랑스에서 쌓은 인맥은 귀국 뒤 덩의 중국공산당 안착을 도왔다. 당 중앙에서 일하며 보안을 위해 ‘작고 평범한’이란 뜻을 지닌 샤오핑(小平)으로 개명했다. 저우는 덩이 당 고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때마다 뒤를 받혀줬다. 덩은 치열한 당내 권력투쟁과 시련을 겪으며 생존법을 배웠다. 그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용납할 수 없는 동기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며 살아남았다. 문화대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장정을 겪으며 덩은 정치적 후원자를 저우에서 마오로 바꾸었다.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마오의 성격에 경도되어 저우에게서 멀어졌다.”(125쪽)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섬으로 몰아낸 뒤 덩과 마오는 공생관계가 됐다. “마오의 전제적 권력은 덩의 찬란한 입신출세를 가능케 했고, 덩의 신속한 승진은 마오의 제왕적 통치”(197쪽)를 도왔다. 1971년 마오의 유력한 후계자였다가 반기를 든 린뱌오가 비명횡사하자 유배돼 있던 덩은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외쳤다. 그리고 펜을 들어 마오에게 편지를 썼다. 린의 반역을 이해할 수 없고 마오의 승리가 기쁘다는 내용이었다. 덩은 1973년 베이징으로 귀환했다.
1975년 덩은 마오의 추천으로 당ㆍ정ㆍ군을 장악했다. “마오는 급진주의자들을 개인적으로 싫어했고, 온건주의자들은 조직으로서 싫어했다. 그런데 덩은 어쩌면 양쪽의 결함을 뛰어넘는 예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262쪽)
저자는 덩의 입신양명 비결과 실용주의 근원을 러시아 체류 시절에서 찾는다. 덩은 프랑스 유학을 마친 뒤 학구적이지 않은 러시아 동방대학을 다녔다. “덩은 공산주의 정치가가 되기에 딱 좋을 만큼만 공부했고… 골수 스탈린주의자가 되지 않을 만큼만 공부했던 것이다.”(85쪽)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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