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기무사 등 자료제출 거부로 두차례 진상규명委 "규명 불능"결론
2012년 폭우로 묘 이장 위해 관 열었다가 두개골 함몰 확인
'장준하특별법'은 국회서 낮잠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우다 의문사한 장준하(1918~1975). 세상을 떠난 지 내년이면 40년, 그의 죽음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검찰은 그가 경기 포천의 약사봉을 등산하다가 실족해 추락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2000~2004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1ㆍ2기는 ‘진상 규명 불능’ 결론을 냈다. 위원회는 국가정보원과 국군 기무사령부 등 정보기관의 자료 제출 거부와 비협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종결된 게 아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유골이 직접 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12년 8월 폭우로 훼손된 묘를 이장하기 위해 열었다가 두개골 함몰이 확인됐다. 추락으로는 나타나기 힘든, 무언가에 세게 맞은 듯 푹 꺼진 자국이 공개되면서 타살 의혹과 재조사 요구가 터져 나왔다. 현재 국회에는 ‘장준하 사건 등 진실 규명과 정의 실현을 위한 과거사 청산 특별법’(이하 ‘장준하특별법’) 제정안이 계류 중이다. 2013년 12월 여야 의원 104명이 공동 발의한 이 법안은 올해 들어 세월호 참사와 지방선거 등에 밀려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는 정의화 이재오 의원이 참여했다.
비가 내린 17일, 경기 파주의 장준하공원 묘역에서 열린 39주기 추도식에 230여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새누리당 소속 정의화 국회의장은 추도사를 통해 “장 선생의 죽음은 타살이며 40주기인 내년까지는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두개골 외상 치료의 일인자로 꼽히는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이다. 두개골 외상을 누구보다 많이 치료한 의사로서 보기에 장 선생 두개골의 함몰 자국은 타살의 증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2012년 두개골 함몰이 공개됐을 때 그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타살이라고!”
장준하의 죽음이 정치적 암살이라는 주장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계속됐다. 추락했다는 시신이 상처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반듯이 누운 데다 착용했던 안경과 시계, 보온병도 멀쩡해서 누가 봐도 이상했다.
‘실족 추락사’라는 정부 발표는 당시 약사봉 산행에 동행했고 장준하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한 김용환의 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하지만 그는 사건 당일과 이후 행적에 의문스런 점이 많고 진술 내용도 오락가락 일관성이 없어서 신뢰하기 힘든 증인이다.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그의 진술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냈으나 왜 거짓 진술을 하는지, 사망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국가정보원과 국군 기무사령부 등 사건 관련 정보기관이 비협조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은 위원회가 요청한 모든 자료를 제공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고상만씨는 국정원이 핵심 자료를 감추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장 선생 사망 직후인 사건 당일 밤부터 시신이 운구된 다음날 새벽까지 약 9시간 동안의 문서가 빠졌음을 지적한다. 기무사령부는 아예 단 한 건의 문서도 내놓지 않았다.
사인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그 동안 몇 차례 있었다. 1993년 민주당 조사위원회,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이 나섰으나 시신을 직접 부검하지 못해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한 유골 정밀 감식은 2012년 이장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이 확인된 뒤에야 이뤄졌다.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에게 감식을 맡겨 2013년 3월 그 결과를 발표했다. “머리를 가격 당해 숨진 뒤 추락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교수는 “두개골 함몰은 추락에 의한 골절이 아니라 외부 가격에 의한 손상”이라고 밝히고 “머리뼈를 가격한 물건은 손상 부분이 좁은 것으로 볼 때 망치보다는 아령이나 큰 돌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정했다.
두개골 함몰은 사건 발생 당시 확인된 사실이지만, 왜 함몰됐는지는 내내 의문이었다. 장준하 사망 다음날인 1975년 8월 17일 새벽 1시 약사봉 현장에서 시신을 검안한 외과 의사는 “오른쪽 후두부 함몰 골절이 결정적 사인”이라고 소견을 제시했으나 당직 검사는 ‘단순 실족사’로 결론을 냈다. 반면 당시 유족의 부탁을 받고 검안한 의사는 두개골 함몰 골절을 확인한 뒤 “추락으로 손상되기 어려운 부위”라고 밝혔고 “넘어지거나 구른 흔적도 없다”고 했다.
1993년 4월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조사위원회에서 사건 발생 당시 검안 그림을 검토한 법의학자 문국진 박사는 “두개골 함몰은 인공적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해 생긴 것”이라는 소견을 냈다.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장 선생의 시신 사진 13장을 토대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울대 법의학교실 등에 감정을 의뢰했으나 부검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진만으로는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끝났다.
사후 38년 만인 2013년 3월 처음으로 유골 정밀 감식 결과가 나왔다. “외부 가격에 의한 두개골 함몰”이라는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의 발표로 오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현실은 지지부진하다.
한달 뒤 4월 대한법의학회는 추락사 쪽으로 추정하는 결론을 내놓았다. 춘천 한림대에서 열린 기초의학 학술대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장준하 의문사 사건 관련 감정위원회 보고’에서 “장 선생의 두개골 함몰 골절은 가격에 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고 사망 전 추락에 의한 결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사건 현장에 가보지 않고 유골을 직접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결론을 내려 비판을 받았다. “정보가 충분치 않아 추가 자료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진실에 다가가기는커녕 후퇴하려는 제스처로도 보일 수 있는 행태다. 대한법의학회 학회장은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이다. 앞서 대한법의학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유골 정밀 감식에 참여해달라는 유족 등의 요청을 거절했다.
장준하의 죽음에 정보기관이 개입했다는 의혹은 사건 초기부터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 선생 사망 직후 청와대에서 보안사령관을 독대한 사실도 확인됐다. 2012년 9월 민주통합당 백재현ㆍ김현 의원이 입수해 공개한 청와대 의전 일지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장 선생 사망 다음날인 8월 18일 오후 진종채 보안사령관을 47분간 독대했다. 그 해 들어 진 보안사령관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박 전 대통령이 독대를 한 것으로 보아 두 의원은 사건 관련 보고를 위한 만남으로 추정했다. 사흘 뒤인 8월 21일 박 전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단독 면담한 사실까지 드러나 권력이 개입한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장준하 특별법은 장준하를 비롯한 의문사 사건들의 진실 규명이 목적이지만 벌써부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과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에서 드러났듯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조사 활동으로는 진실을 밝히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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