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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 창간 민주화 헌신 유신 반대 투쟁 중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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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 창간 민주화 헌신 유신 반대 투쟁 중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입력
2014.08.2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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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언론인, 민주화운동가. 장준하를 그렇게 부른다. 일제강점기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고, 해방 조국에서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그가 펴낸 월간 ‘사상계’는 1950~60년대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잡지다.

20대 청년 장준하는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에 배속된 지 6개월 만에 탈영, 광복군에 들어갔다. 린취안의 광복군 훈련반을 거쳐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하기까지 첫 배속지부터 충칭까지 7개월 동안 그가 걸은 길은 장장 6,000리에 달한다. 해방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광복군 선발대로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으나 일본군의 제지로 돌아갔다가 11월 23일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환국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사상계’를 창간해 자유와 민권을 일깨웠다. 5ㆍ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박정희 대통령 불가론’을 주장하다 1966년 국가원수 모독죄로 복역했다. 이듬해 ‘사상계’가 강제 폐간되자 야당인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석방되는 등 유신 반대 투쟁으로 10여 회나 투옥됐다. 말년에는 재야에서 반독재 민권 운동에 헌신해 재야 대통령으로 불렸다.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로 숨졌을 때 그는 거국적인 개헌 운동을 준비 중이었다.

선생은 지금 경기 파주의 장준하 추모공원에 누워 있다. 인근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던 묘가 2012년 여름 폭우로 파손되자 파주시가 시유지를 내주고 경기도가 추모공원 조성비를 지원해서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장준하기념사업회는 매년 대학생들을 모아 선생이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걸었던 중국 땅 6,000리를 답사한다. 청년 장준하의 불굴의 정신을 몸으로 체험하는 이 행사의 모토는 ‘청년이여 깨어나라’다. 장준하는 그렇게 살아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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