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사해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고 황유미씨는 2005년 5월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골수이식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07년 3월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부친 황상기씨는 딸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한 싸움에 나섰고, 이를 계기로 삼성직업병 피해자 모임 ‘반올림’이 결성됐다. 고 황유미씨, 같은 작업라인에서 일하다 2006년 백혈병으로 숨진 고 이숙영씨에 대해 항소심도 산재를 인정했다. 2011년 1심 판결은 삼성 백혈병 피해에 대한 첫 산재 인정 사례였다.
서울고법은 어제 이들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소송에서 1심과 같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황씨와 이씨가 작업도중 벤젠 등 유해물질과 전리방사선에 노출돼 백혈병에 걸려 숨졌거나 적어도 이런 노출이 발병 및 사망을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함께 소송을 낸 3명에 대해서는 업무와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1심과 같이 패소 판결했다.
일부나마 반도체 작업공정의 유해성을 거듭 인정한 이번 판결은 재판 중인 유사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 교착 상태에 빠진 삼성전자와 반올림 간 피해보상 협상에도 속도를 붙일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7년 여를 끌어온 백혈병 피해 논란에 대해 지난 5월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고 보상을 약속했다. 보상 절차 등에 관한 이견이 협상 지연의 표면적 이유로 알려졌지만, 근본적 문제는 작업환경과 직업병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삼성 측의 태도였다. 삼성전자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고 밝힌 만큼 도의적 책임을 넘어 산재 피해를 인정하고 보상을 서둘러야 한다. 이와 함께 메모리반도체 세계 정상 기업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획기적 작업환경 개선도 이루어 직업병 피해를 줄여야 한다.
피해자들 간 희비가 엇갈린 이번 판결은 산재를 인정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거듭 보여주었다. 현행 산재보험제도와 판례상 업무와 질병 및 이에 따른 사망의 인과관계를 피해자가 입증하도록 돼 있는데, 작업환경이 수시로 바뀌고 사용 물질에 대한 정보 제공이 제한된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족이 이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인정에 인색하고, 기업들이 산재를 줄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OECD 회원국 중 산재사망률 1위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관계 당국과 기업의 자세 변화가 불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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