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섬은 유명관광지인 탓에 사람들이 제법 들어온다. 며칠 전 육지에서 일 보고 들어올 때도 평일이었지만 선표가 매진됐다. 늦게 줄을 섰으면 꼼짝없이 여수에서 하룻밤을 보낼 뻔했다.
단체 여행객은 시끄럽기 마련이다. 피난민처럼 서로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그들의 손에는 예외 없이 소주병과 맥주 캔이 들려있다. 참다 못한 이들이 항의를 해보지만 그들은 다수라는 이유로 들은 척도 안하고 심지어 직원이 와서 제지를 해도 대들면서 깔깔거리기 십상이다. 나도 몇 번 항의를 했는데 그러고 나면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보통의 시각으로 보면 예의가 없는 것이며 이해해 주는 마음으로 보면 여행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고달픈 세대들의 스트레스 푸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파도가 높아지기를 기다린다. 파도가 높아지면 처음엔 환호성을 질러대지만 머잖아 멀미가 시작된다. 기고만장 했던 기세가 꺾이고 이곳 저곳에서 토하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라도 참 보기 안 좋다.
그나마 요즘은 사람들이 좀 조용하게 타는 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생긴 현상이다. 어쩌면 항해에 대해 겁을 먹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사람이라는 게 단체가 되면 아주 단순해지는 그런 족속들이니까. 조금 전 말한 대로 여가 즐기는 법을 모르고 살아온, 우리 근대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젊은 것들도 예비군복 입혀 놓으면 거칠어지지 않던가. 여행지에서의 소란은 그러니까 묵은 감정의 발산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술에 취해 싸움질을 해도 그러려니 쳐준다.
문제는 각 개인의 버릇이다. 정도를 벗어나는 짓을 하는 이들이 있다. 먼저 사람이 사라져 버리는 것. 물론 대부분 해프닝으로 끝난다. 동료들과 다투고 연락을 끊어버린 영감님이 있었다. 동료들이 119에 신고를 했다. 행적을 찾아 119 대원과 해양경찰이 배를 타고 수색을 했다. 나도 배를 몰고 참가한 적이 있다. 사고는 주로 해안에서 일어나므로 서치를 비추며 섬을 돌아야 하고 사람 있을 만한 갯바위엔 직접 내려서 일일이 확인한다. 이거 아주 불편한 일이다. 이 양반은 다음날 아침에 연락이 됐는데 술에 취해 무작정 걸어가다가 그만 길을 잃었단다.
엄마와 떨어져버린 여섯 살 아이도 있었다. 길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넘겨받은 면서기가 리사무소에서 방송을 했다. “짧은 커트머리에 노란색 상의를 입고 있는 남자아이로…” 그런데 엄마가 나타나지 않았다. 면서기는 “느네 엄마 안 오면 여기서 그냥 아저씨랑 살자” 이렇게 말해서 아이를 한 번 더 울렸다. 나중에 엄마가 나타났다. 그녀는 친구들과 술 마시느라 방송을 제대로 듣지 못했단다. 뭐 이 정도면 귀여운 편이다.
술에 취해 여자아이를 껴안은 남자도 있었다. 성추행인 것이다. 아이는 겁에 질려 몸을 떨었고 지나가던 교사가 그 남자를 잡아서 경찰에 넘겼다. 다음날 그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했다. ‘기억에 없습니다’ 이거 자주 들어보는 말이다. 사람들은 못된 것은 뉴스에서 잘도 배운다. 사실 기억을 못하는 게 더 잘못이다.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기억해야 정상 아닌가. 나를 포함한 몇몇은 강력한 처벌을 원했지만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다. 내가 자주 본 것 중에, 그리고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한 것은 이런 장면이다. 손님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반찬 하나가 떨어진다. 손님은 젓가락으로 밥상을 두드린다. 자기를 쳐다보라는 것. 주인이 바라본다. 그러면 다시 젓가락으로 빈 반찬그릇을 툭툭툭 치면서 앞으로 민다. 입은 벙긋도 안 한다. 이 반찬 좀 더 달라는 소리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이때 주인이나 종업원이 받는 모욕감은 상상 이상이다. 저 사람은 누군가의 밑에서 엄청 당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저런 거만한 행동으로 자신의 위치를 격상시키고 싶어 하거나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게 고작 그것뿐일 거라고 그때마다 나는 상상한다. 그게 아니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지 정말 짐작이 안 된다. 자신의 버릇이 자기 인생을 만든다는 명제를 그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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