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추모 인파로 북적… 추모관은 소박한 유품들로 채워 신격화한 마오쩌둥과 대비
鄧 띄우는 시진핑 속내는… 개혁개방 노선 계승 내세워 부패 호랑이 잡기 명분 강화
덩샤오핑 탄생일을 하루 앞둔 21일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하나인 충칭(重慶)에서 북쪽으로 150㎞ 떨어진 쓰촨(四川)성 광안(廣安)시로 가는 고속도로. 길 위에 ‘덩샤오핑(鄧小平) 탄생 11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자’는 붉은 색 현수막이 거의 1㎞마다 내걸려 있었다.
덩의 고향인 광안시로 들어서자 모든 가로등엔 ‘존경하고 사랑하는 샤오핑 동지를 인민들은 영원히 그리워할 것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덩샤오핑의 얼굴을 새긴 붉은 표어판이 축제 같은 추모 분위기를 한층 돋구고 있었다.
표어판을 따라가자 ‘덩샤오핑 고향 유적 관광지’(鄧小平故里旅游景區)로 이어졌다. 평일 낮 12시 가까운 시간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은 이미 꽉 차 있었고 입장을 위해선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유적지는 55만3,600㎡의 넓은 땅에 각종 꽃나무와 연못으로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수목원에 들어온 듯한 길을 따라 10여분을 걸어 가니 1904년 8월 22일 덩샤오핑이 태어난 집이 나타났다. ‘ㄷ’자 모양에 청기와를 얹은 서향 집은 면적이 총 883㎡로 방이 17칸이나 됐다.
유지 집안의 프랑스 유학파 덩샤오핑
신중국의 아버지 마오쩌둥(毛澤東)처럼 덩샤오핑 집안도 동네에선 상당히 부유한 편에 속했다. 현(縣)의 경찰국장이었던 덩샤오핑의 아버지 덩사오창(鄧紹昌)은 2만6,700㎡의 땅에 하인들을 부려 농사와 양잠을 했고, 네 번째 부인까지 맞았다. 덩샤오핑은 고향 집에서 15세가 될 때까지 근처 서당과 신식학교에서 유가 경전과 현대 교과목을 배운 뒤 16세에 충칭으로 갔다. 이후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근공검학(勤工儉學) 학생으로 뽑혀 프랑스 유학을 떠났고 그 뒤로 그가 다시 고향 집을 찾은 적은 없다.
생가 옆엔 ‘덩샤오핑 기념관’격인 현대식 진열관(陳列館)이 세워져 있었다. 탄생 11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보수 작업 때문에 한동안 공개하지 않던 진열관은 지난 19일 다시 문을 열었다. 덧신을 신고 들어서야 하는 진열관엔 덩샤오핑의 파란만장했던 한평생이 그려져 있었다. 1919년 5ㆍ4운동 시위에 참가해 보여준 민족주의자의 모습, 프랑스에서 일하면서 공부하다 1922년 공산당에 가입했을 즈음 찍은 것으로 보이는 앳된 흑백 사진, 소련으로 도망가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 자필로 쓴 계획서, 시베리아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소개한 ‘유라시아 일주 지도’가 전시돼 있었다.
혁명에서 승리해 신중국을 선포한 뒤 1956년 그가 총서기가 됐을 때의 사진,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반대하다 지방으로 쫓겨났을 당시 근무했던 공장 작업장, 당 지도부로 다시 복귀한 뒤 개혁개방 노선을 선언한 1978년 12월 11기3중전회 회의장의 책상과 의자, 그가 늘 사용했던 보청기와 낡은 허리띠,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당시 입었던 옷 등도 눈길을 끌었다. 진열관의 한 가운데엔 1984년 10월 1일 건국 35주년 인민해방군 사열 당시 덩이 탔던 자동차 훙치(紅旗)도 전시돼 큰 인기를 끌었다.
덩샤오핑 옆에 나란히 시진핑 사진
새로 연 진열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맨 마지막 전시물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덩샤오핑 말년 사진 옆에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지난 2012년 12월 총서기 취임 직후 광둥(廣東)성을 찾았을 때 사진이 놓여 있었다. 당시 “중국의 발전과 실천은 덩샤오핑 동지의 개혁개방 결정이 얼마나 지혜롭고 총명하며 정확한 것이었는지 증명하고 있다”고 한 시 주석의 말도 소개돼 있었다. “덩샤오핑 동지는 중국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이고 중국특색사회주의의 길을 연 개창자” “우리는 앞으로도 반드시 이 길로 가야만 하며 이것이 강국의 길이며 부민(富民)의 길”이라는 시 주석의 말도 덧붙어 있었다. 진열관의 안내원은 관람객들에게 “시 주석이 총서기가 된 뒤 맨 처음 방문한 곳이 바로 덩샤오핑 동지가 1992년 남순강화 당시 찾았던 곳”이라며 “시 주석은 덩샤오핑에게 헌화한 뒤 그의 개혁개방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고 설명했다.
진열관 옆엔 20일 새로 추모관이 문을 열었다. 덩샤오핑의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와 안식하길 바라고 만든 건물이다. 덩은 1997년 2월 19일 홍콩 반환을 4개월 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을 화장한 뒤 홍콩 앞 바다에 뿌린 것도 이 때문이다. 덧신을 신고 추모관을 들어서자 아이들과 함께 정겨운 한 때를 보내는 덩샤오핑을 형상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추모관엔 서민들과 격의 없이 지내며 인민들에게서 사랑 받던 덩샤오핑의 인간적 풍모를 느낄 수 있는 유품들이 주로 전시돼 있었다. 소박했던 사무실과 방도 재현돼 있었다. 신격화한 마오쩌둥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했다.
충칭대에 다닌다는 장하이옌(張海艶ㆍ19)양은 “역대 지도자 중 일반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지도자가 바로 덩샤오핑”이라며 “그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위인이자 영웅”이라고 말했다. 왕웨이(王衛ㆍ57)씨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중국은 비로소 잘 살기 시작했다”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좋은 시절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중국인은 방명록에 “덩샤오핑 동지는 우리의 운명을 바꿨다”며 “인민들은 이를 영원히 감사할 것”이라고 적었다.
시진핑 제2의 덩샤오핑 바라는듯
고향 광안시뿐 아니라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을 맞아 중국 전역이 추모 열기로 뜨겁다.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은 지난 18일 ‘덩샤오핑 문집(1949~74)’과 ‘덩샤오핑전(1904~74)’을 편찬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를 비롯 관영 매체들은 덩샤오핑의 업적을 기리는 기고문을 연일 싣고 있다. 인터넷엔 ‘덩샤오핑 추모사이트’와 헌화 게시판도 개설됐다.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헤이룽장(黑龍江)성 후베이(湖北)성 등에서도 추모 행사들이 이어졌다. 관영 CCTV는 매일 저녁 드라마 ‘역사 전환기의 덩샤오핑’(총 48편)을 방영하고 있다.
중국이 이처럼 덩샤오핑을 띄우고 있는 것은 시 주석의 정치적 구호인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중국의 꿈을 실현하고 개혁을 전면적으로 심화하는데 그의 후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 주석은 2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 좌담회를 직접 주재했다. 그는 좌담회에서 “덩샤오핑 동지가 그린 ‘사회주의 현대화’란 청사진에 따라 우리 위대한 조국은 지금 하루하루 번영과 부강의 길로 나아가고 있고 중화 민족도 위대한 부흥으로 향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덩샤오핑 동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사상과 정치적 유산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길을 개창했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덩샤오핑 이론”이라며 “이는 중국의 상황에 맞고 중국의 특성에 부합할 뿐 아니라 시대 발전 요구에도 순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주석은 나아가 “우리 스스로 부족한 점과 안 좋은 것들은 개혁해야 하고 외국의 좋은 점을 배워야 한다”며 “그러나 외국을 그대로 답습해선 안 되고 지나치게 자신을 낮춰서도 안되며 자신의 뿌리를 망각해선 절대 안 될 것”이라고 주문했다. 그는 덩샤오핑의 원대한 이상과 신념, 인민에 대한 사랑과 정, 실사구시 정신, 개척과 창조ㆍ혁신의 정치 용기, 멀리 내다보는 전략 사고, 사심 없고 넓은 도량 등을 배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덩샤오핑 띄우기는 그에 대한 재평가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덩샤오핑이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해 수많은 희생자를 낸 권력 핵심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전’이 1974년까지만 다룬 것도 이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 아직 진행 중이란 걸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외교 소식통은 “시 주석이 올해를 전면심화개혁 원년으로 선언한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계승해 제2의 덩샤오핑이 되고 싶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시 주석이 덩샤오핑을 띄우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부패 세력들을 척결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고 해석했다. 저우융캉(周永康)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를 부패 등 혐의로 잡아들인 데 이어 더 큰 호랑이로 손꼽히는 원로들을 제어하기 위해 이들보다 더 강한 덩샤오핑을 부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충칭ㆍ광안=글ㆍ사진 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