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문화재·유적지 하나 없지만 얼음바람골·노루샘·미녀참나무...
사연 담긴 볼거리 끊임없이 이어져
입소문 타고 단박에 전국 명소로 작년에만 관광객 140만명 다녀가




걷기 열풍이 몰아치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경쟁적으로 도보여행길 조성 사업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전국 590여곳에 걷기 길이 탄생했다. 그러나 저마다 ‘명품길’이라 자부한 길들은 정작 사람들의 발길을 끌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이 별다른 특징도 없이 마구잡이로 조성된 탓이다.
하지만 충북 괴산 산막이옛길은 다르다. 일년 내내 사람들이 몰린다. 작년 한해 찾은 관광객이 무려 140만 2,522명. 제주도 올레길 방문객(2013년 119만 3,727명)보다 20만명이나 많은 인원이다.
2010년 문을 연 산막이옛길은 괴산호를 끼고 도는 4km의 산책로다. 환경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무데크를 산길에 덧댔을 뿐이다. 주위에 문화재나 유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평범한 산길이 어떻게 개장 4년 만에 전국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명소가 됐을까?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마을에서 사은리 산막이마을을 연결하는 산막이옛길은 괴산 촌부들이 만들었다. 이 지역 4개 산골마을 주민들은 권역별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을 함께 추진하면서 관광객 유치 방안을 놓고 고민 중이었다. 이 때 사은리 출신인 임각수(64) 괴산군수가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내놨다. “옛길을 되살려 도시민의 향수를 자극해보자”는 안이었다.
오지 산막이마을 사람들은 산에서 나물과 약초를 캐다가 읍내 장에다 내다 팔아 연명했다. 그러다 1957년 괴산댐이 생기면서 위기를 맞았다. 개울이 호수로 변하면서 마을 대부분이 수몰됐고 천을 따라 읍내로 가던 유일한 육로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산허리를 둘러 가는 비탈길을 만든 것이 산막이옛길이었다
주민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옛길을 정비했다. 거기에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를 덧그림을 그리듯 입혔다.
사연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다니며 겪고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1968년까지 실제 호랑이가 드나들며 살았다는 ‘호랑이굴’, 여우비나 여름 한낮 더위를 피해 잠시 쉬어간 ‘여우비 바위굴’, 앉은뱅이가 마신 후 벌떡 일어나 걸어갔다는 ‘앉은뱅이 약수’, 골짜기 안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얼음 바람골’, 옛날 서당에서 여름철 야외학습장으로 썼다는 ‘고인돌쉼터’, 산짐승이 지나다니며 목을 축인 ‘노루샘’.
산막이옛길을 걷다보면 이렇게 옛정취를 간직한 볼거리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지루할 틈이 없다.
기이한 형상에 흥미로운 전설을 품은 나무들도 즐비하다. 나무꾼이 자르려고 도끼를 대자 웅웅거렸다는 ‘신령참나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사목’,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 벗고 엉덩이를 보이며 무릎을 꼬고 앉은 형상의 ‘옷벗은 미녀참나무’,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가지가 합쳐져 자라는 ‘연리지’ 등등.
산막이옛길은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길 옆 괴산호에는 황포돛배와 작은 유람선이 운항된다. 산막이마을까지 걸어갔다가 힘든 사람은 배로 돌아오면 된다. 등산이 하고 싶은 사람은 길 초입에서 곧 바로 등잔봉에 오르면 된다. 해발 450m의 등잔봉 정상에 서면 맞은편 군자산 자락과 호수가 어우러진 한 폭의 수묵채색화를 감상할 수 있다.
산막이옛길은 입소문을 타면서 단박에 전국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개장 첫해인 2010년 30만명이던 방문객이 이듬해 88만명으로 급증했다. 2012년에는 130만명, 지난해엔 140만명을 돌파했다.
사계절 관광객이 꾸준히 찾는데, 행락철에는 관광버스만 수 백대가 몰리기도 한다. 작년 단풍철 주말에는 하루 최고 4만명이 찾은 적도 있다. 오죽하면 교통혼잡을 우려한 괴산군이 ‘외지 손님맞이를 위해 충북도민들은 산막이옛길 방문을 자제해달라’고 읍소까지 했을까.
전국에서 인파가 몰리자 적막하던 산골은 활기를 찾았다. 주변 식당, 농산물판매점은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고 인근 농촌 폐교는 공공기관이나 기업체의 워크숍, 세미나 장소로 변신했다.
파급 효과는 칠성면을 넘어 괴산군 전 지역으로 퍼지고 있다. 상가, 숙박업소, 교통(버스ㆍ택시)등 지역경제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가 160억원대에 달한다는 전문기관의 분석이 나왔다.
산막이옛길의 관리와 운영은 주민들이 출자해 꾸린 비학봉마을영농조합법인(대표 고종은)이 도맡고 있다. 이 법인에는 주변 4개 마을 330가구, 620명의 전 주민이 참여했다. 체계적인 관리에 힘입어 주민들은 지난해 주차장사용료, 돛배이용료 등으로 총 13억 200만원을 벌어들였다. 일자리도 생겨났다. 관리사무실의 상시근무 직원 13명 가운데 절반이 주민이다. 행락철 성수기에는 주차요원, 안전관리 요원 등으로 주민 중에서 최대 27명까지 채용한다. 이젠 안전과 관련한 자체 직원 교육도 실시한다.
마을영농조합법인의 전광식(46)사무국장은 “주민들이 직접 길을 관리ㆍ운영하기 때문에 방문객들의 불편사항을 즉시 해결하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개장 초기에는 마을 어귀마다 넘쳐나는 차량 때문에 불편해하던 주민들이 지금은 진입로 넓히는데 쓰라고 조상 산소 옆 땅까지 내놓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산막이옛길 덕분에 고소득을 올리게 된 주민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매년 일정액을 괴산군민장학회에 장학기금으로 내놓고 있다.
임각수 괴산군수는 “산막이옛길은 비교적 짧은 코스에 아기자기한 스토리가 참 많은 길”이라며 “자연 그대로를 살린 생태길에 산골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도시민의 향수를 자극한 것 같다”고 말했다.
괴산=한덕동기자 dd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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