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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논 따라 걷는 둘레길, 생명과 평화가 깃든 남원 산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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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논 따라 걷는 둘레길, 생명과 평화가 깃든 남원 산내면

입력
2014.08.2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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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을은 외진 산골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연결되어 있고 함양과 잇닿아 50리에 지나지 않고 3천호에 벗어나지 않는, 실로 자그마한 고을이다. (중략)요새로 말하면 양의 창자나 말의 잔등도 이보다 더 구불거리거나 험난하다 말할 수 없고, 아름다운 경관으로 말하면 어떠한 산과 건물도 이보다 더 아름답다 일컬을 수 없다”

각 지역의 자연과 역사, 풍습과 인물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면지(面誌)는 이름처럼 면 단위로 작성하는 게 보통이지만 전북 남원의 동부지역은 4개 읍·면을 묶어 운성지(雲城誌)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운봉읍 산내면 인월면 아영면을 포함한다. 위의 글은 1922년에 작성한 운성지 첫 머리에 나오는 이 지역에 대한 설명이다. 그 표현처럼 어느 지역보다 빼어난 산과 계곡에 아름다운 둘레길까지 갖춘 남원 산내면을 다녀왔다.

백일리에서 바라본 지리산. 중턱부터 구름이 가려져 운치를 더한다.
백일리에서 바라본 지리산. 중턱부터 구름이 가려져 운치를 더한다.
꼼지락공방 게스트하우스 기와지붕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비 오는 날이면 1,000m가 넘는 지리산 능선이 구름에 가려져 이 또한 여행의 운치를 더한다.
꼼지락공방 게스트하우스 기와지붕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비 오는 날이면 1,000m가 넘는 지리산 능선이 구름에 가려져 이 또한 여행의 운치를 더한다.

산내면을 찾은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숙소로 정한 삼봉산 자락 백일리의 민박집 처마에선 끝없이 낙수가 떨어졌다. 살짝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맞은편 지리 능선엔 중턱부터 구름이 걸려 끝내 정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산세가 오히려 운치를 더했다.

그 구름이 감싼 곳, 뱀사골계곡과 달궁계곡은 등산과 피서를 즐기는 이들로부터 사시사철 사랑 받는 곳이다. 산내면 소재지에서 성삼재로 이어지는 861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뱀사골계곡은 화개재로 연결되는 등산로에서 갈라지고, 달궁계곡은 도로와 나란하다. 계곡도 도로도 물길 따라 휘고 돈다. 물길이 한턱 낮아질 때마다 물웅덩이를 만들고, 하늘을 가린 나무가 물빛마저 초록으로 물들여 청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국립공원 지역이기에 야영은 엄격히 제한된다. 지정된 야영장과 마을이 있는 일부 구간에서만 물놀이가 가능하다. 그날은 물이 불어나 가장자리에서 발을 담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웅장한 물소리만은 가슴까지 시원하게 전해졌다. 계곡 못지않게 정령치로 이어지는 도로도 드라이브 코스로 그만이다. 산 중턱 달궁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가면 구례와 성삼재로 이어지고, 오른편으로 가면 운봉과 정령치다. 어느 길이나 계곡만큼 숲이 우거져 아름답다.

피서객들이 뱀사골계곡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피서객들이 뱀사골계곡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달궁계곡에서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달궁계곡에서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눅눅함이 사라지고 가을바람이 느껴지는 이맘때쯤이면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지리산 둘레길 중 이 지역은 주천~운봉(1구간), 운봉~인월(2구간), 인월~금계(3구간)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3구간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22.4km로 8시간 정도 걸린다. 하루 종일 걸을 요량이 아니라면 짧게 잘라 걷는 것도 괜찮겠다. 중군마을에서 장항마을(4.6km)까지는 숲과 계곡이 좋고, 매동마을에서 등구재(약5.5km)까지는 전망이 시원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발길이 꾸준하다. 등구재 구간은 오르막길이 많아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남원과 함양의 경계지점인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되돌아 내려왔다. 이 길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전망이 백미다. 멀리 지리산 능선 아래 실상사에서부터 부챗살처럼 산등성이로 펼쳐진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로 한걸음 내려설 때마다 풍경은 더 정겨워진다. 황토 마감에 기와를 얹은 전통한옥과 조금은 이국적인 서양식 주택이 산 중턱까지 파고 들었다.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도 눈에 들어온다. 최고의 풍경은 다랑논이다. 하나하나 돌을 쌓아 논둑을 만든 다랑논이 비탈이 끝나는 평지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사이에 마을이 옹기종기 자리잡았다. 올해는 유난히 추석이 이르지만 벌써 이삭을 숙인 벼들이 그 즈음이면 제법 누렇게 변해있을 것이다. 가을빛에 지리산 자락을 황금색으로 수놓을 다랑논을 미리 상상해본다. 그때면 경치도 더욱 풍성하겠다.

등구재 정상의 지리산 둘레길 안내표시. 왼쪽은 전북 남원 산내면, 오른쪽은 경남 함양 마천면이다.
등구재 정상의 지리산 둘레길 안내표시. 왼쪽은 전북 남원 산내면, 오른쪽은 경남 함양 마천면이다.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내려오는 지리산 둘레길 구간은 전망이 시원하다.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내려오는 지리산 둘레길 구간은 전망이 시원하다.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내려오는 지리산 둘레길. 다랑논을 따라 하산하는 길이 정겹다.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내려오는 지리산 둘레길. 다랑논을 따라 하산하는 길이 정겹다.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내려오는 지리산 둘레길에 강아지풀이 피어 있다.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내려오는 지리산 둘레길에 강아지풀이 피어 있다.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내려오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다랑논. 돌을 쌓아 논둑을 만든 노고와 땀방울이 읽혀진다.
등구재에서 상황마을로 내려오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다랑논. 돌을 쌓아 논둑을 만든 노고와 땀방울이 읽혀진다.

대부분 농촌이 인구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산내면은 조금씩이나마 늘고 있다. 2009년 2,000명 아래로 떨어졌던 인구가 올해 2,188명까지 늘었다. 그 중심에 실상사가 있다. 절터가 의아스럽다. 대부분 이름난 절이 경치 좋은 산중에 있는 반면 실상사는 지리산 첩첩산중에 그나마 평지라고 할 수 있는 너른 들 한가운데 있다. 마을에서 올려다보는 곳이 아니라, 산자락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 오히려 절을 감싸고 내려다보는 모양새다. 람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를 지나 연꽃 향이 가득한 연못제방을 둘러가면 바로 천왕문이다. 가파른 언덕길도 턱 높은 계단도 없다. 천왕문을 지나면 널찍한 마당이 나타나고 두 개의 삼층석탑 사이로 본당인 보광전이 아담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대형 사찰의 대웅전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다. 네 귀퉁이에 풍경을 하나씩 달아 놓은 것을 빼면 장식이라곤 전혀 없다. 단청도 없이 맨 살을 드러낸 오래된 나무기둥이 오히려 검소하고 단아하다. 국보 1점과 보물 11점을 보유한 ‘구산선문의 최초 가람’이니 ‘1,200년 신라 고찰’이니 하는 수식조차 번거롭다. 큰 불사에서 풍기는 위압도 위엄도 없다. 그저 평화롭고 평온하다.

실상사 동서삼층석탑과 보광전. 언덕길도 계단도 없어 평온하다.
실상사 동서삼층석탑과 보광전. 언덕길도 계단도 없어 평온하다.
실상사의 본당인 보광전. 대형사찰의 대웅전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다.
실상사의 본당인 보광전. 대형사찰의 대웅전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다.
실상사 동서삼층석탑과 보광전. 대형 사찰이 주는 위압이나 위엄없이 그저 평화롭고 평온하다.
실상사 동서삼층석탑과 보광전. 대형 사찰이 주는 위압이나 위엄없이 그저 평화롭고 평온하다.

“마을이 절이고, 절이 마을이죠”이경재 종무실장은 실상사의 역할을 그렇게 정의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에 펼치는 도량으로 봐달라는 당부다. 실상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생태뒷간’이다. “생명을 살려내는 길은 똥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냄새는 좀 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되살리는 고마운 생명의 향기입니다” 생태뒷간에 대한 설명이다. 일반적 추세와 반대로 실상사는 수세식 화장실을 재래식으로 바꿨다. 배설물은 잘 삭혀 농장의 거름으로 사용한다. 짭짤한 수익원이던 커피와 음료 자판기도 없앴다. 생명평화의 철학을 강조하는 사찰답다.

1998년 IMF직후 귀농학교를 연 이후 실상사는 지역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졸업자 중 일부가 지역에 자리잡고부터 대안적 가치에 목마른 이들이 산내면을 중심으로 꾸준히 모여 들었다. 산내초등학교 학생의 절반이상이 귀농인 자녀들이고, 중·장년층의 1/4정도가 외지인이다. 어느 선을 넘어서자 스스로 자생적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선 즐길 거리도 스스로 꾸려 갑니다. 도시에선 문화생활도 소비지만 농촌에선 만들고 참여하죠”인구 2천명이 조금 넘는 산내면에 문화 모임이 43개이고, 주민들은 평균 2~3개 모임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음악과 연극, 글쓰기와 춤, 바느질과 도자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꼼지락 공방’과 게스트하우스를 겸하고 있는 최은주(45)씨가 전하는 산내면 생활이다. 연간 수입이 500만원도 안 된다는 집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살아진단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따져 물을 필요는 없었다.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고 이 곳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실상사 생태뒷간 안내판엔 입에 올리기 꺼리는 단어인 "똥"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실상사 생태뒷간 안내판엔 입에 올리기 꺼리는 단어인 "똥"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실상사 보물제41호 철조여래좌상은 약사전에 보존돼 있다.
실상사 보물제41호 철조여래좌상은 약사전에 보존돼 있다.

“충절을 지킨 선비는 척박한 고을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방탕한 풍속은 기름진 고을에서 유행한 것을 볼 때 작은 부귀를 버리고 대의를 지키는 것이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운성지의 표현이 대안적 삶을 찾아 산내면을 찾아 든 이들의 마음을 미리 읽은 듯하다.

남원=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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