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청준(1939~2008) 선생이 단편 ‘흐르는 산’을 발표한 해는 1987년이다. 전두환 정권 철권통치 7년 임기의 마지막 해였다. 그 해 내내 대학캠퍼스는 최루탄 가스로 자욱했고, 거리는 시위대로 파도처럼 들끓었다. 국민은 연말 대선이 또 다시 ‘체육관선거’로 치러져 군부가 재집권하는 일만은 막겠다는 각오였다. 민주화운동은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결집됐다. 1월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고, 6월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일까지 벌어져 국민적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 현실의 강력한 자장으로부터 누구도 벗어나 있기 어려웠던 그 엄혹한 시기에 작가가 던진 질문은 종교적 구도(求道)의 사회적 의미였다. 작품의 주인공은 ‘무불 스님’이다. 무불 스님은 일제강점기 말 작중 화자 격인 ‘도섭’이 고향에서 일본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뒤 도주해 스며든 ‘대원사’라는 절의 선승이다. 스님은 치열한 정진과 넓은 도량으로 그 즈음 도섭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사연을 감춘 채 절집으로 스며든 인물 군상들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다.
▦ 인간과 세상의 참 지혜를 향한 스님의 치열한 구도의 의지를 보여주는 건 ‘앉은 잠’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눕지 않고 늘 좌선하는 자세로 밤을 지샌다는 절집 대중의 말을 도섭은 믿지 않는다. 몇 날 며칠을 지켜본 끝에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도섭의 마음 속엔 새로운 의구심이 일기 시작한다. 세상과 동떨어진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도섭은 “스님께서 여기 혼자 그리 아파하고 계신다고 세상 아픔이 조금이나마 줄어듭니까?”라며 따지듯 묻는다. “산이 높아야 물이 멀리 흐르는 법이니라”고 스님은 답한다.
▦ 마침내 해방이 되던 날, 절을 나와 읍내로 향한 도섭은 광복을 환호하는 인파 저 멀리 연단 위에서 자신과 함께 절집에 숨어 지냈던 낯익은 인물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끄는 모습을 발견하고 알 수 없는 감동에 휘말린다. 인연으로 해서 산은 강물이 되어 흐른다는 스님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박5일 간 우리 사회 곳곳의 고통과 절망을 어루만져 줬다. 그 온화한 미소와 눈빛으로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던 위로와 감동을 남겼다. 치열한 정진으로 드높아진 맑은 영혼의 산에서 강물이 흘러 널리 퍼지고 있음을 느낀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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