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모처럼 TV의 서바이벌 가요프로그램을 보았다. 아니 대부분은 들었다. 거실 TV를 켜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며. 볶을 것은 볶고, 찔 것은 찌고, 끓일 것은 끓이면서 흘려 들은 어느 가수의 노래는 너무 형편 없었다. ‘저런 실력으로도 가수로서 밥을 먹고 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궁금해서 TV 앞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깔끔한 얼굴의 여가수 목소리가 갑자기 매력적으로 들렸다.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방청객들의 모습은 금세 내 가슴에까지 잔잔한 떨림을 전했다.
▦ 노래의 감동은 동원되는 감각의 수만큼 늘어난다. 귀로만 들을 때, 화면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현장감을 더할 때, 현장에서 가수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대형 스피커가 내뿜는 소리의 파동이 직접 피부를 흔들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라이브 공연은 청각과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까지 즐겁게 한다. 한 가지가 덧붙는다.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입장권을 예매해 놓고, 공연을 손꼽아 기다리며 키워온 마음의 준비다. 이렇게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이라면 어지간한 공연은 다 황홀하다.
▦ 예술ㆍ문화적 감동은 전달자와 수용자의 교감(交感)이나 공감(共感) 덕분에 가능하다. 교감이나 공감은 감각ㆍ정서 주파수가 정확한 배수(倍數)를 이룰 때 일어나는 주파수 공명(共鳴)에 비유할 수 있다. 바로 이 공명을 위해 악기의 줄을 고르듯, 준비된 관객은 자신의 감응 주파수를 미리 맞춰 둔다. 사람의 모든 교감이 마찬가지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살피려는 마음이 있어야 산과 들의 길섶에 핀 야생화를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이웃의 아우성이 들린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용서할 준비’를 마지막 메시지로 어제 4박5일의 방한 일정을 마쳤다. 정서보다 높은 정신작용인 의지에 대한 언급이다. 교황은 명동성당 미사에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마태복음을 인용,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위해 정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의 손길은 세월호 유가족과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그가 말한 ‘용서할 준비’는 언제쯤이나 우리사회가 갖추게 될까.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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