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예상 밖 장기전에 애국심 사라진 군대… 체제 위협 요소로 돌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예상 밖 장기전에 애국심 사라진 군대… 체제 위협 요소로 돌변

입력
2014.08.18 14:37
0 0

참호전-돌격전 이어지며 50개월 지휘관 19세기 기병대식 공격 환상

19세기 후반 도입 징병제가 암초로… 시민-군대 제휴할 가능성 높아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으로 떠나는 군인을 가득 태운 프랑스 열차와 환송객 모습. 전쟁 초기 입대자들은 전쟁이 곧 끝나고 귀향할 것으로 낙관했다. AFPㆍ로이터=연합뉴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으로 떠나는 군인을 가득 태운 프랑스 열차와 환송객 모습. 전쟁 초기 입대자들은 전쟁이 곧 끝나고 귀향할 것으로 낙관했다. AFPㆍ로이터=연합뉴스
전쟁이 2년째로 접어든 1916년 프랑스 솜 전투에서 영국군 병사들이 참호 밖으로 전진하는 모습. 장기전으로 치달으면서 병사들은 비위생적인 참호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지내야 했고, 발이 썩어 들어가는 ‘참호족염’에 시달려야 했다. AFPㆍ로이터=연합뉴스
전쟁이 2년째로 접어든 1916년 프랑스 솜 전투에서 영국군 병사들이 참호 밖으로 전진하는 모습. 장기전으로 치달으면서 병사들은 비위생적인 참호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지내야 했고, 발이 썩어 들어가는 ‘참호족염’에 시달려야 했다. AFPㆍ로이터=연합뉴스

그림이 아닌 사진으로 모습이 전해지는 첫 전쟁은 1850년대 중반 크림전쟁일 것이다. 그 뒤로 사진기는 발전을 거듭했고, 덕분에 제1차 세계대전 면모가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각 교전국이 동원을 개시한 1914년 8월에 전선행 열차에 탄 병사들이 찍힌 빛 바랜 사진을 보노라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삶과 죽음이 갈릴 싸움터로 나서는 병사들이 해맑게 웃고 있기 때문이다. 선전용으로 연출된 억지 웃음만은 아니었다.

참호전으로 끝난 단기전의 환상

병사의 얼굴에 핀 웃음꽃은 단기전으로 끝나리라는 낙관에서 비롯됐다. 두어 달 싸워 승리한 뒤 연말 전에 동원ㆍ해제되어 마을 사람의 환영을 받으며 고향에 돌아가 가족과 성탄절을 지내며 무용담을 늘어 놓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넉 달 안에 찾아올 듯 했던 종전은 단풍이 물드는 계절이 네 번 돌아올 때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약 50개월에 걸친 전쟁 기간 동안 지상전은 주로 참호전 형태로 치러졌다. 소부대가 적군 총격과 포격을 피하려고 몸을 숨기던 참호는 차츰차츰 확장되어 대대나 연대 병력이 한꺼번에 들어가 일상 생활을 하는 공간이 되었다. 참호에 있는 군인에게 알맞게 디자인된 트렌치코트는 훗날 부슬비 내리는 날 멋쟁이 신사가 입는 낭만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실제 참호는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참호에서 일상을 보내는 병사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병사는 여유를 주면 잡생각이 나서 군인 정신이 사라진다고 믿는 장교에게 쉴새 없이 시달렸다. 유일한 위안거리인 가족과 친구의 편지는 띄엄띄엄 오는 데다가 철저한 검열 대상인지라 중간에 폐기되기 일쑤였다. 생각 없이 일어서기라도 하면 머리가 참호 위로 올라가 적군 저격병의 먹잇감이 되었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은막에 옮긴 영화에서 주인공은 나비를 잡으려고, 또는 새를 그리려고 몸을 참호 밖으로 내밀다가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는다.

유사 이래 싸움터에서 군인을 따라다닌 질병은 참호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았다. 들끓는 쥐와 이를 없애려고 애를 쓰던 병사는 지친 나머지 위생을 포기했다. 온갖 질병이 괴롭혔지만, 특히 참호에서 창궐한 병은 이른바 참호족염이다. 가뜩이나 속옷과 양말을 갈아입기 힘든데 비라도 내리면 참호 바닥에 물이 괴었고, 며칠 동안 젖은 군화를 벗지 못한 병사들의 발은 썩어 들어갔다. 1916년 3월 프랑스 이프르 지역의 참호에 투입된 영국군 부대원 400여명 가운데 사흘 만에 탈진과 참호족염으로 전열에서 이탈한 병사가 자그마치 100명이었다.

질병에 국한한다면, 제1차 세계대전의 병사는 그나마 행운아였다. 20세기 이전에는 적군의 총칼보다 야전 생활을 하다가 얻은 병으로 더 많이 죽었지만,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서는 이런 속성이 뒤집혔다.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더 적게 나온 최초의 전쟁이 바로 1904~1905년 러시아-일본 전쟁이다. 예전이라면 야전에서 배앓이를 하다가 죽었겠지만 러시아를 정벌하는 알약이라는 뜻의 정로환(征露丸)으로 목숨을 구한 일본 군인이 부지기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유럽의 병사들은 참호에서 갖가지 병에 걸렸어도 목숨을 잃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악마의 기술이 된 현대문명

그러나 근대 과학기술에게는 질병을 퇴치하는 천사의 면모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각종 병기를 무한대로 생산해내는 악마의 면모도 있었다. 과학기술에 힘입어 19세기에 비약적으로 향상된 화기의 파괴력과 정확도는 한껏 발휘되었고, 그 희생양은 병사였다. 지휘관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참호에서 뛰쳐나가 돌격하는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적군 포탄에 사지가 찢겨 날라갔고, 용케 살아남더라도 적군 진지 앞 철조망에 이르러 전진 속도가 현저히 느려져 빗발치는 기관총탄에 볏단처럼 픽픽 쓰러졌다.

전사자와 부상자의 수가 천문학적 수준으로 치솟는 것은 필연이었다.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몰아넣는 독일의 히틀러가 이 때에는 젊은 병사로 1914년 늦가을에 이프르 전투에 투입되어 첫 전투를 치렀다. 히틀러가 소속된 연대 611명 가운데 349명이 전사했고, 그가 속한 중대는 더 큰 피해를 입어 대원 250명 가운데 42명만 살아남았다. 물론 그 42명에 히틀러가 끼어 있었다.

전쟁 내내 참사가 지속되었다. 1916년 전반기에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군 공세를 막아낸 연합군은 반격에 나서 7월부터 11월까지 파상 공격으로 적진을 들이쳤다. 이 솜 전투에서 영국군의 인명피해만 42만명이었고, 총 인명피해는 100만 명을 웃돈다. 솜 전투 첫날에 영국군이 자국 젊은이 2만명 목숨을 희생해서 전진한 거리는 “자그마치” 몇 십 미터였다. 이런 식의 땅따먹기 놀이가 지속되면서 젊은이의 무덤만 늘어갔다. 독일에서 주 징집 대상이 된 남성 19~22세 연령집단의 규모가 전쟁 기간 동안 무려 35% 넘게 줄었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 군대의 단위 부대는 지역 별로 편성되었다. 동향 젊은이들이 같은 부대를 구성했던 것이다. 따라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뒤 며칠이 지나면 전선에 투입된 부대에 소속된 젊은이들의 고향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에서 전사통지서를 움켜쥐고 오열하는 부모와 형제자매가 줄을 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이런 슬픔은 독일의 미술가 콜비츠가 1914년 막내아들을 잃은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제작한 판화 연작에 잘 나타나 있다.

큐브릭 감독의 영화 영광의 길에는 전투에 임하는 장병의 심리가 섬세히 묘사되어 있다. 1916년 프랑스군의 미로 장군은 예하 연대에 독일군 고지를 빼앗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장군은 아군 피해를 돌격 초기 적군 포화로 5%, 무인지대에서 10%, 적진 앞 철조망에서 20%, 고지 점령 과정에서 25%라고 예상한다. 군사학에서 병력 30%만 상실해도 궤멸이라고 보는데, 사령관은 그 두 배를 잃어도 돌격을 감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급 장교들은 작전이 비나 안개로 취소되기를 바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하늘은 야속하게 쾌청하기만 하다. 전투 전야에 병사는 전투에서 차라리 머리에 치명상을 입어 고통스럽지 않게 죽기를 바라며 잠을 청한다.

19세기 장군을 짓누른 20세기 ‘사회혁명’ 공포

물음이 떠오른다. 왜 장군들은 인명 피해가 그토록 막심한 전투 방식을 고수했을까? 한 가지 이유는 20세기 전쟁을 지휘하는 고위 사령관들이 용맹한 기병대식 돌격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로망을 버리지 못한 19세기형 군인이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모한 작전이 실패한 까닭을 병사들이 겁쟁이여서 용감하게 진격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병사들이 더 용감하게 돌격하면 다음 작전은 성공하리라고 생각했다. 고정관념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또한 사회혁명의 공포도 작용했다. 전쟁에 지친 전선의 병사와 후방의 국민이 사회주의 선동에 이끌려 체제를 뒤엎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지휘관들은 혁명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고, 그러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대공세를 펼쳐야 했다. 사회혁명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초조감에 무모한 공격이 남발되었던 것이다.

전쟁 초에는 애국심 물결이 병사와 국민을 휩쓸었다. 1914년 7월까지만 해도 10만 명 넘게 파업에 돌입하고 바리케이드까지 치며 경찰과 싸우던 러시아 제국의 수도 성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도 일단 자국 정부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자원병 대열에 동참했다. 11월에 프랑스에 배치된 영국군 녹스 일병은 “가장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한 것은 “무한히 영광스러운 일이며 승리가 코앞에 있다”고 썼다.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주인공도 담임 교사의 호소에 이끌려 급우 20명과 함께 입대한다.

이런 애국심은 극심한 피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차츰차츰 사그라지고 그 빈 자리에 염전 사상이 들어섰다. 1916년부터는 프랑스 병사 사이에 항명이 만연했고, 베르됭 전투의 영웅 페텡 장군이 전선을 돌며 병사들을 달랜 끝에 사태가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녹스는 1918년 2월12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권력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전쟁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 전선에서 지금 당장 평화가 이뤄지기를 바라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장군들의 초조감에는 이유가 없지 않았다.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군대는 기존 체제를 지키는 굳건한 보루였다.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할 최하층민과 외국 용병이 병사로 충원되었고, 이들이 시민 편에 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까닭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듯, 폭정에 맞선 봉기 시민은 군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바리케이드에서 군대와 싸웠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징병제가 도입되면서 일반 국민이 병사가 되었다. 시민혁명 시대와 달리, 시민이 압도적 무력을 독점한 군대를 제압하기란 불가능해졌지만, 병사들이 일반 국민에서 충원되는 만큼 시민과 군대가 제휴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이제 군대는 체제의 보루가 아닌 체제의 위협 요소로 돌변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그 가능성이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현실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병사의 이반을 겨우 막아냈지만, 러시아 제국은 1917년 2월에 병사의 이반을 막지 못하고 와르르 허물어졌다. 독일 제국도 비슷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킬 군항의 해군 병사들이 군부의 출항 명령에 항명하면서 정부가 무너졌고 볼셰비키형 혁명이 독일에서도 일어날 듯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지배 체제와 군대의 상관 관계가 바뀌었고, 이 변화는 병사들의 경험과 직결되어 있었다.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