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이스라엘에 관한 두 개의 모순적인 기억이 존재한다. 첫 기억은 이십 년 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남긴 기억이다. 수용소로 끌려온 이들의 신발과 안경, 가방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방. 가스실 벽면의 죽어가는 이들이 남긴 손톱자국. 머리를 깎인 채 찍은 유대인들의 얼굴 사진이 벽을 메우던 방.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좌절과 절망의 기운이 엄습하던 공간이었다.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유대인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가혹한 박해를 받았던 피해자였다.
두 번째 기억은 1996년 가을 이스라엘 여행의 기억이다. 그 무렵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 알 아크사 사원 옆에 이스라엘 정부가 새 출입구를 개통한 탓에 극렬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수십 명이 사망했고, 거리에서는 자주 총성이 울렸다. 충돌 사이에 힘의 균형은 없었다. 이스라엘은 이제 다윗의 영악함까지 가진 골리앗이었다. 그들이 강제로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고 쌓아가는 분리 장벽은 그들의 삶도 두르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쌓아 올린 공포와 불안의 벽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이스라엘은 타인의 삶을 초토화시켜가며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가해자였다.
그 후 여행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청년들과 종종 마주쳤다. 정치나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피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여행자 규칙을 어겨가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거대한 장벽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일 뿐이며,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은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방위일 뿐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안전을 이유로 타인의 일상을 장벽 안에 가둘 권리는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여행에 대한 내 믿음이 흔들렸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여행한다. 학교나 사회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배우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것.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쌓아온 ‘생각의 성’을 무너뜨리는 것. 그게 여행이라고 믿었다. 이스라엘 청년들에게도 여행이 그런 거였다면 지금의 이 학살을 이스라엘 국민의 87%가 지지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스데로트 언덕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불타오르는 가자 지구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며 환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 국민 중에도 물론 양심적인 이들이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같은 이가 그렇다. 이스라엘과 중동계 청년들로 구성된 ‘웨스트이스턴디반 오케스트라’를 만든 그는 이스라엘 정부가 수여하는 울프상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유대 민족이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보냈다고 이웃 국가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 하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질까요?” 하지만 바렌보임 같은 이는 너무 적다.
인간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미덕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이 있기에 우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수치스러워하며, 지금 이스라엘에서 자행되는 팔레스타인 학살을 규탄한다. 이스라엘이 들어선 이후 강제이주를 당하지 않은 팔레스타인 사람은 거의 없다. 파편과 잔해, 폭격의 흔적으로 얼룩지지 않은 골목도 없다. 가족 중에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죽거나 다치지 않은 이가 있는 가정도 없다. 집집마다 마을마다 수많은 남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감옥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학교다. 높이 8㎙의 장벽으로 격리된 마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치욕스러운 검문과 수색을 당하며 자라는 아이들을 상상해본다. 그 아이들에게 감히 용서나 화해를 말할 수 있을까. 평화와 화해는 더 많이 가진 이의 양보에 의해 이뤄질 뿐이다. 끔찍한 과거를 겪은 피해자였다고 해서 가해자가 된 오늘의 현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교황이 이 땅에 오셨다. 강자가 정의가 돼서는 안 된다고 팔레스타인 땅을 먼저 방문했던 그다. 세월호와 밀양과 강정, 평택을 넘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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