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를 모태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이력 때문인지 나는 샤머니즘이나 토템 같은 토속적인 물상들에 생래적인 거부반응이 있다. 사찰의 대문에 있는 사천왕상을 보면 등골이 오싹하고 탱화 같은 것에도 심한 이물감을 느낀다. 점집에 꽂힌 대나무와 생닭의 깃털과 붉은 깃발 같은 제의의 상관물에도 심한 거부감이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신 김금화 선생의 자전에세이를 만드느라 선생님 댁을 드나든 적이 있는데, 한 번은 점심을 먹고 가라면서 밥상을 차려준 적이 있다. 그리고 선생님과 겸상을 하게 됐는데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해서 그 밥을 먹는 게 거북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서구적 이성, 혹은 오성과 합리, 판단력 같은 것에서 인간의 가능성과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찾는 게 확실히 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질이 사실은 문학을 하는 것에는 방해가 된다. 내 생각에 문학이란 주술성이 강한 예술이다.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문학에 개입하는, 혹은 문학이 넘보는 영성이나 초현실적인 세계의 재현은 작가가 어떤 영적인 상태를 유지할 때 혹은 영적인 세계에 닿았을 때 가까스로 가능해진다. 이성과 객관에 대한 강박적 신념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주관적 몰아의 세계에 진입하기가 힘들다. 내가 소설가로서 종종 겪는 혼란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성과 광기의 끊임없는 교섭과 충돌 같은 것 말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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