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시작에는 늘 언 땅을 뚫고 싹이 트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잎은 너무나 여리고 보드랍다. 그렇게 약하고 조그만 생명이 딱딱한 흙 바닥을 헤치고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고 놀라운 장면이다. 혹독한 겨울에 얼어 죽지 않고 땅속에 있었던 것도 신기하고, 단단한 흙을 뚫고 나오는 것도 신기하다. 손으로 살짝 만지기만 해도 찢어져 버릴 것 같은데 몇 달이 지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몇 년이 지나면 나보다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그 싹을 바라보며 생명에 대한 귀함과 애틋함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그렇게 치열하고 끈질기게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살아간다. 그 에너지들이 합쳐지고 갈라지고 또 이어지면서 세상이 돌아간다. 나는 그 모든 존재들의 사이에 작은 바퀴로 살아가고 있다.
네팔에서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한 적이 있다. 푼힐 전망대까지 다녀오는 4박 5일 코스다. 제대로 된 등산화도 준비하지 않았고, 그저 젊은 혈기에 ‘의지’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마을, 포카라에서 시작했는데, 거기서 보이는 안나푸르나는 손에 잡힐 듯 선명했고 정말 아름다웠다.
안나푸르나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가게 된 것이다.
초반에 길은 대부분 계단 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돌을 가져다 만들어 놓은, 끝도 없이 하늘로 이어지는 계단. 그 끝은 구름이나 안개 때문에 늘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한 발자국도 더 못 가겠다 싶을 때 즈음 쉴만한 공간이 나타났고, 빈 터에 걸터앉으면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맞은편 산과 골짜기가 천국 같았다. 몇 시간이고 그렇게 가는 것이다. 높은 곳을 향해서 계속 올라간다. 엄청 올라왔겠다 싶은 곳에서 마을을 만나고, 사람들은 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나무 타는 냄새가 나면 마을이 나타났다. 착한 눈을 한 아이들이 맨발로도 날 듯이 뛰어다니고, 작은 아이가 더 작은 아이를 업고 있다. 우리나라 1950~60년대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애들이다. 작은 아이들이 나마스테(안녕하세요)를 외치며 다가오면 늘 기분이 좋았다. 시간과 공간이 다 풀어지고 헝클어져서, 애들이 나의 부모님의 어린 시절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와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서로 신기한 듯 바라보지만, 그 시선에는 어디서 만들어졌을지 모를 애정이 담겨있었다.
산을 오르고, 기가 막힌 풍광을 만나고, 절벽 끝에 앉아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귀여운 아이들을 만나고, 그 눈망울을 가슴에 담았다. 좋은 것들이 많았지만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죽을 것 같았다.
천근만근인 다리, 점점 가빠지는 호흡, 띵하게 저린 머릿속… 이놈의 계단이 언제 끝나려나 하고 계단 끝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아서 기운이 빠졌다. 가도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무기력해졌다. 두발로 올라가기도 벅차서 손 까지 동원해 네 발로 올라갔다. 그만큼 가파른 계단이다. 그러다가 정말 가기 싫어져서 멈췄다. 그리고 눈을 감고 숨을 몰아 쉬다가 눈을 떴다. 눈 앞에는 아주 작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같이 얇은 줄기를 가진 이끼가 나와 있었다. 콩나물 같은 이끼 끝에는 정말 작은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더 들여다 볼수록 신기했다. 물방울에는 내 얼굴과 건너편 산 까지 담겨 있었다. 그렇게 작은 물방울에 세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을 것만 같은 그 생명을 보면서 새로운 힘이 생겼다. 그렇게 한 발자국씩 더 올라 갈 수 있었다. 올라가면서 계단 사이에 피어올라 있는 처음 보는 꽃이나 작은 싹들을 보면서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그냥 수 만개의 계단이 아닌 낯선 생명들을 품고 있는 수많은 세계인 것이다. 참으로 신나는 길이었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다. 끝만 보고 달려 가려면 중간에 지치고 만다. 나 혼자라면 에너지가 고갈돼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그리고 나와 연결된 모든 생명이 나에게 힘을 보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이어져 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꽃별 해금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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