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자기기만이란 게 있다. ‘나’를 충분히 통제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게 그 예라고 한다. 긍정적 자기기만은 삶에 도움이 된다는 게 저 말을 찾아낸 학자들의 견해인 듯하다. 자기계발서 같은 데서 반갑게 인용할 만한 이야기다.
‘정의는 승리한다’는 믿음도 그런 걸 테다. 저 말은 내가 정의의 편이라는 걸 전제한다. 그 역시 그런 걸지 모른다. 공적 영역에서 어이없는 일들이 자고 나면 불거지고 있지만 과거보다는 나아졌고, 더디게나마 나아져갈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나도 한 적이 있다. 근거를 대라면 논리가 아닌 사례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그 말도, 실은 희망이나 당위에 기댄 긍정적 자기기만이다. 상반된 사례도 얼마든지 있을 테고, 사례들을 다 모아 분류한 뒤 무게를 비교할 수도 없는 노릇일 터이기 때문이다.
‘루터’라는 영국 수사드라마를 보다가 버틀란트 러셀이 했다는 말을 들었다. 옳게 들었는지 모르겠고 맥락도 알지 못하지만, 요지는 대충 “선한 자가 고통 받고 악당이 잘되는 것처럼, 세상 한 켠에는 거대한 불의가 존재한다.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을 아는 게 더 괴로워 우리는 눈을 돌린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살인자가 지문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믹서기에 제 손을 넣는, 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끔찍해서 눈을 감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손목에 붕대가 친친 감긴, 조금은 견딜만한 장면을 바라봐야 한다. 나는 우리가 눈감은 불의가 러셀이 말한 것처럼 세상 한 켠에 있다기보다 마음 한 켠에,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신(所信)이란 그런 불의에 맞서기 위한 미시적 전선일 것이다. 소신은 그럴싸할수록 스스로를 곤혹스럽게 한다. 지키자니 어렵고 꺾자니 죄의식과 자기혐오가 따른다. 소신이 없다면, 또 등 따시고 배부른 게 최고라는 이른바 ‘먹고사니즘’이 소신이라면 어떨까. 중뿔나게 안 나서도 되고, 무리 속에서 판단도 선택도 책임도 안 질 수 있고, 승산 있는 편에 서서 뭔가를 얻거나 적어도 부당한 손해는 면할 것이다.
이성은 명분으로 이해를 감추는 일에 능하다. 명분 안에서 자신에게 정의의 망토를 걸치게도 한다. 순도 100%의 선악은 없다는 식의 자기합리화도 가능하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자기 혐오를 잊거나 누그러뜨린다. 긍정적 자기기만이란 게 미덕이라면 그렇듯 아슬아슬한, 기만적인 미덕일 것이다. 사실 자기혐오에 둔감해지면 많은 걸 기대할 수 있다. 스트레스도 덜 받고 암도 잘 안 걸릴 것 같다. 진화론적으로 경쟁력 있고 유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가능성도 높다. 나는 진화론만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없다고 생각한다.
윤모 일병의 내무반에서 일어난 일들, 그의 영혼과 육체를 학대한 선임병들과 그 학대를 방관하고 은폐했던 지휘관들의 내면에서 나는 그런 양상을 엿본다. 인간보다 군인을 앞세우고 인권보다 군인정신을 우선시하는 군 최고수뇌부의 그것은 분칠한 제노사이드의 신념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자사태는 어떤가. 늘어가는 억울한 희생들, 책임 있는 국제정치 주체들의 오연한 방관, 긴 세월 홀로코스트의 죄악을 앞세워 세계의 양심에 휴머니즘을 호소하던 저 수많은 반나치 유대 지식인들의 비겁한 침묵에서도, 진화론적으로 확장하는 저 불의의 경향을 본다. 양상이 너무 일방적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하마스는 제쳐두고 이스라엘만 성토하는 것도 께름칙하다. 100명이 숨졌다고 1명의 살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군이든 이스라엘이든 공인된 불의를 사후적으로, 그 인식을 공유한 무리 안에서, 성토하기란 쉽다. 불의와 선을 긋고 정의의 이름으로 무리 짓는 일. 그 유구한 패턴 위에서 이 사회가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거기 편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긍정적으로’ 나를 기만한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눈을 감으면 나는 기만으로 아늑해진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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