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공산당 숙청 수백만명 피해 1996년 7·27민주항쟁 유혈 진압
민주화 상징 메가와티 집권 뒤에도 군부 눈치 보며 과거사 청산 미적
조코위 돌풍 덕에 집권 성공한 야당 진실과 화해 향한 전향적 조치 주목
지난 7월 10일 인도네시아 세 번째 직선제 대통령 선거 결과 조코 위도도(조코위) 후보의 우세가 발표되자, 메가와티 투쟁민주당 총재는 눈물을 흘렸다. 조코위를 앞세워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으며 이루게 된 당의 부활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때 인도네시아 민주화 세력의 상징이기도 했던 그는 직선제로 바뀐 2004년 대선부터 두 차례 연속 육군 장성 출신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시며 정권탈환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메가와티의 아버지는 인도네시아의 국부(國父)라 불리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이다. 수카르노는 1950년 초대 대통령에 오른 뒤 1963년 종신(終身) 국가원수가 됐지만, 1966년 수하르토 장군에게 실권을 이양하고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후 1970년 병으로 숨졌다.
수하르토는 1968년 2대 대통령에 오른 후 32년간 장기 집권했다. 메가와티 총재는 수하르토 말기 민주화 세력의 상징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쿠데타로 몰아낸 정치군인을 상대로 민주화 투쟁을 벌여 승리한 것이다.
메가와티는 그동안 1997년과 1999년 총선 등 두 차례 선거에서 승리했다. 당시 정권이 허용한 유일 야당 민주당에서 메가와티가 민주화 상징으로 떠오르며 높은 인기를 얻자, 수하르트 정권의 개입을 받던 민주당은 1996년 메가와티를 두고 새 총재를 뽑는 당대회를 열었다. 결국 메가와티와 지지자들은 민주당사 침탈과 반정부 시위, 폭동으로 이어지는 7월27일 사태를 통해 투쟁민주당을 결성하고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들은 1997년 총선에서 비록 수하르토 정권의 골카르당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민주당을 처참하게 몰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1998년 5월 수하르토의 하야로 이어졌다.
수하르토 하야 후 당시 부통령이던 골카르당의 하비비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자유화와 단계적 민주화 바람이 인도네시아를 덮쳤다. 그리고 메가와티의 투쟁민주당은 1999년 총선에서 3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종교와 지역 등 사회적 균열이 복잡한 인구 2억명의 다당제 인도네시아에서 이것은 역사적인 대승리였다.
그러나 간선제 형식으로 선출된 인도네시아 제3대 대통령은 메가와티가 아니었다. 메가와티는 정치력 부족으로 간선제 하의 합종연횡에 실패해 12.61%를 득표한 국민각성당의 압두라흐만 와히드 대통령을 보좌하는 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만족해야 했다. ‘메가와티 대통령’의 꿈은 그로부터 2년 후, 와히드 대통령의 탄핵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기대에 못 미친 메가와티의 민주화
그러나 메가와티 집권 3년(2002~2004)은 그가 집권을 하면 인도네시아 민주화가 크게 성숙될 수 있을 거란 기대보다는 더딘 행보를 보였다. 물론 메가와티 집권 시기가 민주화 초기의 하비비, 와히드 시기보다는 덜 혼란스러웠다는 평가는 많다. 각지에서 빈발하던 종교 폭동은 줄었고, 분리독립 투쟁이 벌어지는 아체에는 단호하게 계엄령을 선포하여 반군의 기를 꺾었다. 또 군부 요직에 개혁파 인사들을 임명하고, 1965-66년 공산당 숙청의 피해자들에게 사적인 자격으로 사과하는 등의 행동을 한 와히드처럼 군부와 보수파의 미움을 살 행동도 애써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9년 투쟁민주당이 와히드의 국민각성당, 아민 라이스의 국민수권당 등 개혁파 인사들이 만든 개혁파 정당들과 연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인도네시아 다당제의 특성상 연립정부 구성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더욱 대담한 민주화의 걸음을 내딛을 필요성도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거국연립내각인 ‘무지개 내각’을 구성해 정당마다 골고루 장관 자리를 나누고, 군부 이익도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다.
이처럼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99~2004년 의회에도 8%의 군부 몫 의석이 남아 있었다. 군부에는 탄탄한 조직과 막대한 자금이 있었다. 민주화는 군부 인사들에게도 기회였다. 그들은 골카르당을 비롯한 각 당에 입당하여 중앙과 지방의 정계에 진출했다. 메가와티는 군부 출신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2002년 수티요소가 자카르타 지사 재선에 나설 때 많은 투쟁민주당 당원들은 크게 반발했다. 수티요소는 7월 27일 사태 당시 자카르타의 치안을 책임진 군 장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가와티와 당 지도부는 수티요소를 지지했다. 이처럼 7ㆍ27사태와 직접 관련 있는 인물들이 계속 요직을 차지하며 이에 대한 검찰 조사는 지지부진해졌다. 사법처리는 민주당사 침탈에 관여한 용역 1명이 징역 2개월 10일을 선고 받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
여타의 과거사 문제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1965년 공산당 숙청은 지도부가 관여한 쿠데타 시도의 책임을 물어 합법 정당이었던 공산당원과 외곽 조직원을 학살하거나 재판 없이 14년까지 투옥해 수백만 명의 피해자를 낸 거대한 비극이다. 당시에는 와히드 시대에 물꼬가 트인 화해에 대해 메가와티 정부도 일정한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메가와티 시대의 변화는 이 사건에 대한 역사교과서 보조 교재 집필진을 꾸리는 정도였고, 정책으로서의 화해와 진실규명 추진은 지지부진했다.
1999년부터 만든다고 했던 진실화해위원회법은 2003년에야 입법이 시작되었다. 메가와티가 법안에 서명할 때는 이미 임기가 다 끝나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를 더 빨리 진척시켜서 위원 임명까지 하고 물러났으면 어떤 식으로든 1965년의 숙청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의 과거사에 대한 공식적 진실규명의 첫 단계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메가와티와 투쟁민주당은 탄핵당해 쫓겨난 와히드의 전철을 밟지 않는 데에만 골몰했다.
메가와티와는 달라야 할 조코위의 민주화
대통령직은 지켰지만, 2004년 대선의 결선투표에서 메가와티는 유도요노 후보에게 61% 대 39%로 고배를 마셨고, 투쟁민주당의 총선 득표율도 반토막이 났다. 2009년 대선에서는 결선투표조차 필요 없이 61% 대 27%로 대패했다. 조코위가 혜성처럼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투쟁민주당은 10년 만에 제1당의 지위를 탈환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 후보인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의회의 60%에 육박하는 정당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데다 투쟁민주당의 선거 전략 부재 탓에 조코위는 돌풍과도 같은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힘든 싸움을 했다. 하지만 조코위는 결국 투쟁민주당에 대통령 직선제 사상 첫 승리를 안겼다.
이제는 ‘굴러들어온 돌’ 조코위가 15년 전 민주화를 맞은 민중들이 투쟁민주당에 걸었던 기대를 채울 수 있을까에 관심이 쏠린다. 선거 기간 무성했던 흑색선전은 조코위가 사실은 공산당이고, 기독교인이고, 메가와티의 허수아비라고 주장했다. 앞의 두 가지는 사실이 아니지만 조코위가 투쟁민주당의 후보였던 만큼 그의 운명이 투쟁민주당의 운명과 함께 갈 것임은 틀림없다.
인도네시아는 75% 이상의 광역단위와 50% 이상의 기초단위에 지부를 설치해야 창당이 가능하다. 진입 장벽도 높고, 조직 관리 비용도 많이 든다. 조코위의 신당 창당은 힘들 것이다. 투쟁민주당은 메가와티가 여전히 총재를 맡고 딸이 원내대표직을 맡는 등 리더십의 정체 속에 운영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조코위는 대통령으로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투쟁민주당을 ‘혁신’할 수 있을까.
군부출신, 재벌출신 정치인들의 민주주의 지지를 이끌어냈던 기존 나눠먹기식 민주주의를 타파하고 원칙있는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가 펼칠 ‘새 정치’의 지향점은 어디일까?
화해와 관련해 조코위가 무엇을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2009년에는 대선 캠프 세 군데에 모두 장성 출신의 후보자가 있었다. 메가와티는 수하르토의 사위이자 육군 특수부대장 출신으로 각종 인권침해 의혹을 안고 있는 프라보워를 부통령 후보로 삼아 대선에 나섰다. 온건파일지언정 유도요노 대통령은 7ㆍ27 사태에 직접 연루된 군부 출신이었고, 그의 장인이자 초대 주한 대사인 사르워 에디 장군은 65년 당시 학살 작전을 앞장서 치른 공수부대 지휘관이었다. 유도요노는 10년 내내 과거사 문제를 미루기만 했다.
올 대선에서 수하르토 시대의 잔재 프라보워 후보와 대리전을 치러 이긴 조코위의 인도네시아는 지금까지처럼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인 조치 없이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시대 정치적 탄압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고 그들에게 큰 빚도 없는 그가 메가와티와 투쟁민주당의 무력함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진실규명 정책을 펼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성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서지원 서강대 동아연구소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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