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히드라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 뱀이다. 목을 치면 그 자리에서 새 머리가 돋아나며, 그 중 하나는 영생불사라 아예 벨 수도 없다. 이 넘치는 생명력은 다만 신화적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다. 연못이나 늪에 사는 1㎝ 안팎의 강장동물 히드라도 죽음을 모른다. 온몸이 줄기세포로 이루어져 있어 무한분열과 막강 재생력을 자랑한다. 분자생물학을 전공하는 K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히드라가 실험실의 연구대상이 된 건 1991년부터인데, 그때부터 키운 손톱만한 생물이 노쇠의 징후 없이 여태도 건재하다고 한다. 나는 무심히 감탄을 흘렸다. 와. 여기저기서 줄기세포 타령이더니 그럴 만하네. 사람의 몸도 히드라처럼 통째 줄기세포면 얼마나 좋을까. 늙지도 않고 흉터도 남지 않고… 그러자 K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주름과 흉터만 안 남는 게 아니라 기억도 안 남을 텐데요. 뇌세포도 무한분열 무한증식할 테니 기억이 몸 밖으로 줄줄 흘러나가 아무데서나 존재할 수도 있고요.” 아, 그런가. 당장은 거부감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을 떠올리니 그러면 좀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마음이 그대로 너의 마음이고, 아프리카의 마음이 곧장 이곳의 마음이며, 단식할 수밖에 없는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도 고스란히 전해질 텐데. 공감능력 제로의 몰지각한 말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시절이라 히드라처럼 진화한 신인류를 자꾸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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