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무력화 전략
감염 직후부터 조기 약물치료, 3중 복합처방 '칵테일 요법'
환자와 희생자 격감시켜
의사이자 활동가
환자를 종속적 실험대상 아닌 모든 연구자의 파트너 간주
"심장을 지닌 과학자" 평가
비운의 극적 죽음
우크라 접경서 미사일 격추된 말레이시아 항공기에 탑승
격렬했던 그의 전투 마감
“우리가 아프리카 먼 오지에서 시원한 콜라와 맥주를 마실 수 있다면 에이즈 치료제도 못 구할 이유가 없다.”
에이즈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조엡 랑게는 2002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14회 국제 에이즈 소사이어티(IAS) 폐막 세션 의장 수락연설에서 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대미문의 치명적 질병 앞에서 우왕좌왕하던 국제 사회가 비로소 에이즈라는 이름을 붙여 진영 정비를 시작한 지 만 20년이 되던 해였다.(에이즈(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란 표현은 1982년 9월 미국질병통제센터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그날 랑게는 국제 에이즈학계와 활동가들, 정치인과 보건관료 등 1만7,000여명의 회의 참가자 앞에서 에이즈와의 새로운 전쟁을 선언했다. 면역결핍바이러스와 에이즈 연구 못지않게, 기존 연구의 성과를 차별 없이 누릴 수 있도록 국제적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거였다. 앞선 20년간의 연구에서 감염자의 조기치료나 칵테일요법 등 획기적인 진보를 이끈 저 발군의 학자는 “이제 IAS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덜 알려졌지만, 이런 멋진 말도 남겼다. “가난한 이들을 죽이는 수많은 질병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나쁜 정부다. 나쁜 정부와 리더십 부재가 그 어떤 질병보다 많은 목숨을 희생시켜왔다.”(뉴욕타임즈, 2002년 7월 13일자)
조엡 랑게(Joseph Maire Albert ‘Joep’ Lange)가 7월 17일 숨졌다. 향년 60세. 그는 지난달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 반군의 미사일에 격추된 것으로 알려진 말레이시아항공 MH-17편의 승객가운데 한 명이었다.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제20차 IAS총회 참석차 출국한 그의 곁에는 반려이자 동료였던 재클린 반 톤저린과 4명의 국제 에이즈활동가가 함께 있었다.
랑게는 198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M.D(Medical Doctor) 학위를 받고 의사가 된다. 미국질병통제센터(CDCP)가 폐렴 증상의 ‘새로운 질병’ 환자 5명에 대한 최초 보고서를 낸 게 그 해 6월이었다. 인턴십을 마친 그가 HIV와의 그 전쟁에 뛰어든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 질병이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것이라는 첫 가설 논문이 나온 건 83년이고,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뤼크 몽타니에와 프랑수아스 바레시누시 연구팀(2008년 노벨생리의학상)이 HIV의 정체를 확인한 건 그 이듬해인 84년이었다. 암스테르담 대학 병원 임상의로서 80년대의 랑게는 HIV보균자가 AIDS 환자가 되는 과정의 병리학적 변화를 연구, 보균자의 혈액 속 특정 단백질(P24)이 항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 논문으로 87년 박사학위(PhD)를 받는다.
초창기 에이즈 연구 진영의 풍경은 참담했다. 미국 듀크대 부설 국제보건연구소 마이클 머슨 소장은 “에이즈가 등장한 이후 15년여 동안 우리는 에이즈와 관계된 거라면 뭐든 얻기 위해 죽을 각오로 달려들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젊은 의학자들이 실제로 숨졌다”고 말했다. 랑게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그는 당시 에이즈 연구자들 사이에는 전우애와 흡사한 동지의식이 있었다며 “그들 속에서 랑게는 언제나 전위였다”고 말했다. 1990년 국제보건기구(WHO)의 글로벌 에이즈프로그램 총괄 책임자였던 머슨은 92년 랑게를 에이즈 임상및 치료제 연구개발 책임자로 발탁, 3년간 함께 일한 바 있다.
연구자로서 랑게는 4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고, 그 중에는 생애 동안 두세 편 쓰기도 힘들다는, 타 논문에 100회 이상 인용된 논문만도 10편이 넘는다. 학자들은 그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세 가지를 그의 업적으로 꼽는다.
먼저 HIV감염자의 조기 치료다. 에이즈는 HIV가 인체에 침투해 혈액 속의 면역기능을 담당하는 T세포 등을 공격, 면역력을 파괴함으로써 2차 질병으로 목숨을 잃게 하는 병이다. HIV가 인체 면역기능에 이상을 일으키며 에이즈를 발병시키는 데는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0년도 넘게 걸린다. 랑게는 HIV 양성 환자 14명의 병 진행 과정을 2년 넘게 추적한 88년 논문(‘Journal of Clinical Investigation’에 발표)에서 HIV 감염 직후부터 최대한 빨리 약물치료를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이제는 에이즈 요법의 상식이 됐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HIV 감염 자체를 차단하고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HIV의 활동력을 둔화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었다.
에이즈 예방이 어려운 이유는 HIV가 무척 빠르고 다양하게 변이하기 때문이다. 랑게는 HIV의 변이 자체를 억제하는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으로 3중 복합처방(triple-combination drug therapy)을 제안하는 논문(89년, ‘Journal of Virology’)을 발표한다. 이제는 ‘칵테일 요법’이라는 이름으로 보편화한 이 치료법도 당시로선 뜨악한 요법이었다. 그의 처방대로라면 감염자는 하루 20알에 달하는 알약을 먹어야 했고, 약값만도 1년에 1만5,000달러에 달했다. 환자의 간과 신장에 무리를 줘서 다른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제 그의 처방은 하루 한 알 복용으로 줄었고, 약값도 100달러 선으로 저렴해졌다. 그의 HIV 무력화 전략은 AIDS에 대한 학계와 의료계의 대응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꾼 거였다.
2003년 랑게는 르완다와 우간다의 감염 산모 가운데 자원을 받아 항레트로 요법을 처방, 신생아감염 비율을 15%에서 1%로 줄였고, 그 성과를 2003년 프랑스 파리 IAS 총회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유엔 에이즈계획(UNAIDS)의 2013년 보고서에 따르면 HIV 감염자는 연평균 최고 350만명에서 250만명 선으로 줄었고, 사망자도 2005년 230만명에서 2012년 160만명으로 격감했다. 2012년 현재 전세계 HIV 감염자는 약 3,530만명. UNAIDS는 2011년 3월 에이즈 발병 30주년 보고서에서 지금까지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은 약 3,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랑게 등 연구자와 예방활동가들의 노력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기세가 꺾이긴 했지만 에이즈는 여전히 인류의, 특히 동성애자의 가장 무서운 질병 가운데 하나다. 또 에이즈 자체보다 더 절박하고 분통터지는 위협은, 랑게의 선구적인 통찰처럼, 빈부와 지역에 따른 에이즈 격차(AIDS GAP)이고 그 격차의 해소를 가로막는 국제 정치와 국제무역체제다. 이제 에이즈는, 여러 감염성 질병이 그러하듯, 가난한 이들의 질병이 돼가고 있다.
2004년 랑게의 후임으로 2년 임기의 IAS 의장이 된 헬레네 게일(현 비영리기구 ‘CARE’ 대표)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그냥 의사도 있고, 연구자도 있고, 사회활동가도 있다. 하지만 랑게는 그 모든 영역을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로 수용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심장을 지닌 과학자였다”고 말했다.(NPR, 2014.7.18)
랑게는 호주와 태국의 연구 네트워크인 ‘HIV-NAT’를 구축했다. ‘NAT’는 네덜란드 호주 태국의 영문 첫 알파벳이다. 미국 알러지 감염질병 국립연구소 부책임자인 클리포드 레인 박사는 “HIV-NAT는 개발도상국과의 국제 임상 협력연구의 최초 모델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NYT) 랑게는 의학자들이 병리실험을 하면서도 환자를 잊곤 한다고, 환자는 종속적 객체가 아니라 연구 파트너라고 말했다.(이코노미스트, 2014.7.26) 활동가그룹인 국제에이즈연대의 아프리카 책임자인 숀 멜러스는 90년대 중반 랑게와의 첫 만남을 회고하며, 그와 만나기 전까지 연구그룹과 활동가 그룹의 본격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멜러스는 “랑게는 HIV보균자와 끊임없는 대화, 나아가 지역 사회와의 토론과 접촉을 무척 중시했다”고 말했다.
그런 랑게에게 92년 미국의 조지 허버트 부시 정부가 보스턴에서 열릴 예정이던 IAS총회에 HIV보균자의 참석을 불허한 것은 난센스였을 것이다. 당시 의장도 무엇도 아니던 그는 반쪽행사가 될 뻔한 그 해 총회를 네덜란드에서 열릴 수 있도록 발벗고 나서 성사시켰다. 2000년 총회를 아프리카에서 열자고 발의한 것도 그였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는 에이즈에 가장 취약한 지역이고, 그는 매번 환자나 보균자와 만났다고 멜러는 말했다. “그들의 이슈가 뭔지, 뭘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랑게는 지역사회의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고, 그것을 자신의 모든 활동에 반영하고자 했다.”(NPR) 그는 IAS의장이 되기 전부터 활동가였다. 항바이러스요법 저널(The Antiviral Therapy)을 만들어 편집자로 일했고, 의학 전문가와 활동가들의 교육 사이트인 ‘HIV(e)Ducation’의 과학분야 책임자로도 활약했다.
이코노미스트에는 그의 2005년 일화가 소개돼 있다. 미국 FDA가 HIV치료제 가운데 하나를 예방약으로 승인한 건 2012년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미 2000년대 초반서부터 치료제의 예방 효과를 알고 있었고, 일부는 매춘부 등 감염 위험군에게 복용을 권장하기도 했던 듯하다. 하지만 일부 활동가 그룹은 예방약을 복용할 경우 콘돔 사용을 기피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연구자들의 활동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랑게는 2005년 한 의학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그들 활동가를 맹비난하며 이렇게 썼다. “콘돔 사용은 남자의 선택으로 여자가 개입할 여지가 부족하지만, 알약은 여성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일이다.” 랑게는 스스로 판단해서 명백히 바보스러운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신랄한 비평가였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썼다.
2001년 그가 암스테르담에 본부를 둔 비영리 민간기구 ‘PharmAcess Foundation(PAS)’을 설립한 것도 에이즈 갭을 줄이기 위한 활동의 하나였다. 그는 PAS와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더 많은 의사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더 많은 전문 의약품이 보급하고자 애썼다. 그 일은 그에게 로비스트의 역할을 요구했을 것이다. 각국 정부와의 협력, 독일 맥주회사인 하이네켄처럼 아프리카 시장에 눈독을 들여온 주요 다국적기업을 설득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2000년대 후반 미국 주도의 아프리카 에이즈기구인 ‘PEPFAR’ 등이 개도국 의약품 보급을 역점사업으로 펼치게 된 이후 PAS는 네덜란드 보험회사들과 아프리카 각국의 의료보험을 연계하는 프로그램과 공중보건 시스템 정비를 위한 차관 알선 등에 주력, 나이지리아와 탄자니아 케냐의 건강보험펀드를 만들기도 했다. 숨질 때까지 그의 공식 직함은 PAS 의장이었다.
랑게는 늘 바빴고 또 늘 출장 중이었다고 PAS의 매니징 디렉터 미셀 헤이든리크는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프로그램을 구축하기 위해 탄자니아에 갔다가 돌아온 직후였다고 한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랑게가 보낸 문자메시지도 ‘super-busy’였고, 헤이든리크는 늘 출장 다니는 그였기에 잘 다녀오라는 인사조차 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보건투자기금의 실무책임자인 오노 셀러켄 박사는 “내 친구(랑게)는 정치와 인간적 가치가 불화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며 “다소 철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가 친러 반군의 미사일에 피격 당해 숨을 거뒀다는 사실이 그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걸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부고 기사에서 랑게는 그를 숨지게 한 군인들 못지않게 격렬하고 더 중요한 자신의 전쟁을 치르다 숨진 순교자라고 썼다.
1998년 스위스항공 여객기의 추락으로 탁월한 에이즈백신 연구자 메리 루 클레멘트를 잃은 기억이 있는 국제 에이즈 학계는 랑게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에 빠졌고, 그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누군가를 당장 찾기는 힘들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게일은 NPR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리더는 뭐든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팀을 조직한다. 조엡은 어떤 영역에서 일을 하든 위대한 팀을 만들었다. 그 팀들이 건재하고 그들이 조엡이 시작한 일을 물려받아 해낼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