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수혜로 성장한 최대 가발회사
회삿돈 빼돌리고 일방적 폐업 통보 여공 187명 신민당사서 최후의 항전
분노한 노동자들 결집 조짐 보이자 무장경찰 1000명 동원 무차별 진압
기득권 지키기 한층 교묘해지고 소외계층-공권력 충돌 여전한데
사람들은 충격에 점점 둔감해져 세상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높은 기온에 습기가 더해지자 찌는 듯한 더위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8월 초의 마포대로는 고층 빌딩에 붙은 에어컨 실외기와 왕복 10차로 대로를 메운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휘감겨 거의 통째로 삶기는 중이었다.
아마 그 날의 더위도 못지 않았을 것이다. 1979년 8월 9일 새벽 다섯 시 반 서울 중랑구 면목동 YH무역의 여공 187명은 마포구 도화동에 있던 신민당사 건물로 비밀리에 이동 중이었다. 당시 여공들의 나이는 기껏해야 20대 초중반. 제일 맏언니 격인 최순영 노조 지부장의 나이가 스물 여덟이었다.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 통보에 맞서 지난 5개월 간 투쟁해온 이들은 최후의 항전을 벌일 장소로 신민당사를 택했다.
1966년 가발공장으로 시작한 YH무역은 박정희 정권의 ‘선성장 후분배’ 정책의 수혜를 받아 10명이던 직원을 4년 만에 4,000명으로 불리며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1970년 당시 순이익이 12억7,000만원을 넘어섰으나 직원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 없었다. 연장근무를 밥 먹듯이 했으나 여공들은 연장근로수당이란 단어조차 몰랐고, 기본급이 없어 회사가 일을 안 주면 기숙사비를 못 내 쩔쩔매야 했다.
사세가 급격히 기운 건 창업주인 장용호 회장이 미국으로 돈을 빼돌리면서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장 회장은 현지에서 호텔과 백화점을 경영하며 회삿돈 수십억 원을 횡령했다. 구멍 난 재정을 견디다 못한 회사는 더 이상 월급을 줄 수 없다며 1979년 3월 폐업을 선언했다. YH노조 투쟁의 신호탄이었다.
1975년 설립된 노조에서 노동운동의 ‘노’자도 몰랐던 최순영 씨가 지부장으로 추대된 건 “가장 일을 잘 하니 회사도 무시 못할 것”이라는 순진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 즈음 회사를 나가 하청업체를 차릴 생각을 하던 최 씨는 자신이 노조의 기반을 닦아 놓으면 후배들이 편해질 거란 단순한 생각으로 지부장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전국섬유노동조합본부(섬유본조)와 크리스찬아카데미 등을 통해 배운 근로기준법은 최 씨를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했다. 퇴직금이라는 게 있고, 연장근무를 할 때는 그에 따른 수당을 받아야 하며, 상여금이 사람 이름이 아니라 회사가 빼돌린 자기들 돈이라는 것, 모두 처음 접하는 사실이었다. 최 씨는 하청업체의 꿈을 버렸다.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받은 4박5일간의 교육 마지막 날, 각자의 비문을 써보라는 말에 그는 “평생 노동운동가로 살다 죽다”라고 썼다.
노조원 중 김경숙이란 아이와 친해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편모슬하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온 김경숙은 최 씨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다. 노조 활동에 열심인 여공들 중에서도 김경숙은 특히 열정적이었다. 노조 설립으로 실제 처우가 개선된 건 거의 없었지만 자신들의 고단함과 억울함을 호소할 근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숨통이 트인 듯 했다. “여긴 진짜 천국인 것 같아요.”
그러나 8월 6일 회사의 최종 폐업 통보로 노조 활동도, 생계 수단도 모두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노조 간부들은 당시 연을 맺고 있던 한국교회사회선교협회 등의 조언을 받아 신민당사로 투쟁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9일 새벽 네 시, 기숙사 문이 바깥에서 뜯기는 소리가 나자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한 노조원들은 한 명씩 몰래 기숙사 밖으로 빠져 나갔다. 최순영 지부장의 지휘 아래 여공들은 네 명씩 짝을 지어 마포로 향했고 그 사이 문동환 목사, 고은 시인 등 재야인사들은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을 찾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는 당시 그의 심중이 나와 있다. “사실 당시 신민당의 처지로서는 당사를 농성장소로 내준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불쌍한 여공들을 내몰면 더 이상 갈 데가 없고 극단적인 사태도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시 신민당의 처지란 박정희의 철권통치 아래 유명무실했던 야당의 초라한 입지를 가리킨다. 1967년 2월 보수 야당세력을 통합해 창당한 신민당은 제1야당의 지위를 확보했지만 집권 민주공화당의 노골적인 탄압으로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70년 6월엔 당 기관지에 김지하의 시 ‘오적’을 연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새벽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당사를 급습, 기관지를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1976년 5월 전당대회에는 각목을 든 조직폭력배들이 나타나 대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여공들이 신민당사로 몰려온 1979년 8월은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당사를 마포로 옮긴 지 석 달도 채 안되던 시점이었다. 걸핏하면 군홧발에 짓밟히던 기억을 털고 새 건물에 짐을 푼 신민당원들은 역사에 기록될 쟁투가 다시 이 곳에서 벌어질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9일 아침 9시 반 건물 안으로 무사히 진입한 여공 187명은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곳이라면 좀 더 오래 투쟁할 수 있을리라, 우리의 억울함을 바깥에 알릴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각계의 지지 방문이 이어지고 언론이 주목하면서 이들의 바람은 현실이 되는 듯 했다. 머리에 끈을 두르고 ‘배고파 못살겠다’란 현수막을 든 여공들의 사진은 당시 비인간적 대우를 묵묵히 견디던 다른 노동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매주 90시간씩 일하면서 기본급 1만1,000원을 받던 해태제과 여성노동자, 군 출신 장성들에게 특혜를 주려는 용달협회에 대항해 여의도에서 시위하던 용달차 운전기사 등 각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우리도 마포로 가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본편중?노동억압이라는 정권의 기치 아래 찍소리 못하던 노동자들의 분노가 마포를 중심으로 결집할 조짐을 보이자 청와대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10일 저녁 기동경찰과 사복을 입은 괴한들이 신민당사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4층 강당에서 수백 명의 경찰과 수십 대의 경찰차가 빽빽이 들어찬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던 여공들의 마음에 싹 튼 것은 두려움 보다는 울분이었다. 밥을 달라는 요구에 몽둥이로 화답하는 정부와 자본가, 자신들을 불온세력이라 매도하는 언론. 투쟁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개최한 종결대회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이 낭독되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조합원들이 발작적으로 울부짖으며 창문에 매달렸다. 8명이 실신해 병원에 실려가고 김영삼 총재가 올라와 진정시키면서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을 지경이었다.
11일 새벽 2시 자동차 경적 소리가 세 번 울리는 것을 신호로 무장 경찰 1,000여명이 신민당사를 습격했다. 건물에 있던 신민당원과 국회의원, 기자, 여공 가릴 것 없이 무참히 얻어 맞고 개처럼 끌려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23분이었다. 진압 과정에서 당시 상집위원이던 김경숙이 4층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경찰은 김경숙이 동맥을 끊고 투신했다고 발표했으나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의 사망이 경찰의 과잉 진압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땀과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됐던 그 때의 신민당사 터에는 현재 고층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지번조차 사라진 175의 4번지와 근접한 SK허브그린빌딩 1층 카페에서 최순영 당시 노조 지부장을 만났다. 경기 부천시 학교급식네트워크에서 운영위원장으로 일하는 그는 1979년 이후에도 종종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지금도 YH 모임을 해요. 모이면 그 때 일을 얘기하죠. 스스로 기특하다고들 해요.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정의의 편에 줄 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당시 최 씨는 하청업체를 차려줄 테니 지부장을 그만두라는 사측의 회유를 수 차례 뿌리쳤었다. 폭행의 기억이 상처로 남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답했다. “아찔한 기억이기는 하지만 상처는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승리했으니까요.” 무력 진압으로 40시간 만에 끝나버린 이들의 투쟁은 유신 체제 붕괴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카페에서 나오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최 씨의 평온한 표정은 바뀐 시대를 실감케 했다. 정보과장의 뺨을 후려치던 야당 총재도, 배고파 못살겠다고 쓴 여공들의 현수막도, 노조원들에게 몰래 격려금을 건네던 기자도, 지금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는 시절이 좋아졌다고 웃으며 돌아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사주의 자금유용, 노동자들의 항의, 공권력의 무자비한 진압, 그리고 이름 없는 누군가의 사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도식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최근의 장면들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 기득권을 지키려는 전략은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고 사람들은 약자가 당하는 핍박에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으니까요. 무관심은 권력이 판칠 수 있는 가장 좋은 터죠.”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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