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새 판타지 사극 '야경꾼일지'
역사에 없는 왕, 영험한 활, 이무기 등
시대배경만 조선, 내용은 허구로 가득
역사적 개연성 있어야 상상력도 통해
MBC가 새로 시작한 월화사극 ‘야경꾼일지’는 이른바 판타지 사극이다. 정통이든 퓨전이든 어느 정도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극에 익숙한 시청자라면 ‘야경꾼일지’가 자못 낯설었을 것이다. 역사에 없는 해종(최원영)이라는 왕이 등장하고 그 왕이 궁에 생긴 변고를 해결하기 위해 원정대를 꾸려 백두산 원정을 떠난다. 왕은 거기에서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왔을 법한 해골 거인과 싸우고 마고족이라는 종족에게서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활을 받아 이무기를 죽인다.
원정대, 해골거인, 왕만 사용할 수 있는 영험한 활 그리고 이무기. 10년 전으로만 해도 사극에서 볼 수 없던 소재들일 것이다. 그런 소재들이 한 사극에 그것도 한 회에 쏟아져 나온 건 이례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중국의 무협물과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물이 한국식 퓨전사극과 섞인 듯한 인상을 준다.
사극이 역사를 버린 지는 오래됐다. MBC는 ‘조선왕조 오백년’처럼 역사를 재연하는 정통사극을 만들더니 ‘대장금’이나 ‘허준’처럼 역사의 변방으로 시각을 돌린 퓨전사극을 주도하고 다시 ‘해를 품은 달’이나 ‘구가의 서’처럼 역사를 아예 벗어난 판타지 사극으로 방향을 틀었다. ‘야경꾼일지’는 MBC 사극 계보의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다.
사극의 이 같은 흐름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에서 생겨났다. 역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결국은 통치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것, 그러니 그렇게 세운 역사는 민중을 배제한다는 것. 정통사극에서 퓨전사극으로 가는 그 길에는 배제되거나 축소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나마 역사를 채워 넣으려는 욕망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사극이 역사의 갑옷을 벗고 상상력으로만 훨훨 날아다니기 시작하자 시청자들은 다시 역사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KBS ‘정도전’ 같은 정통사극의 부활이 보여준 것은, 사극은 어쨌든 역사를 바탕으로 했을 때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판타지 사극을 경험한 시청자에게 ‘야경꾼일지’의 판타지가 과하긴 해도 그리 경악할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판타지라 해도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최소한 당대의 사회 분위기나 문화 등을 담아야 하는 건 의무다. ‘야경꾼일지’가 그리는 시대 분위기는 조선의 그것과 괴리가 너무 크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에서 귀신을 물리치는 야경꾼이라는 비밀 조직을 왕이 이끈다는 설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왕이 원정대를 이끌고 이무기를 죽이러 백두산으로 원행을 한다는 이야기도 조선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조선이라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조차 지워버렸다면 나았을 수 있다. 그랬다면 이처럼 드라마가 조선을 이무기 같은 존재를 믿고 살아가는 미개한 종족 사회로 왜곡시키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고조선이나 고구려라면 모르겠지만 조선이라면 너무 지나친 상상력이다.
사극이 역사를 벗고 상상력과 만나는 게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시대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은 있다.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나름 개연성은 있어야 한다. 조선이라면 기본 배경이나 문화 정도는 바탕이 돼야 판타지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상상이 공상이 되면 사극의 재미가 반감되고 역사만 훼손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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