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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워크룸 프레스의 ‘제안들’

입력
2014.08.0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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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은 ‘삼중당문고’(1988)라는 시에서 ‘열 다섯 살,/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문고/150원 했던 삼중당문고’가, 그리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 문고/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문고/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문고/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문고’가, 아니 문학이 그의 삶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가늠토록 했다.

뒤틀어진 현실에서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도피처이자 계몽의 열정, 근대인의 소양, 지적인 허기(때로는 허세)를 채워주기도 했을 파란만장한 문고판의 추억이 나에게는 별로 없다. 대신 나의 열 다섯 살에는 동서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36권이 있었다. 어쩌면 그 시기야말로 중산층의 꿈에 부응하는 중후한 양장판에 장식성을 갖춘, 아파트 거실이나 서재를 고려한 전집류가 더 유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명문대를 나왔지만 재복은 없었고 근면했지만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던 부친이 어떤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당시에도 고가였을 각종 전집들을 빼곡하게 책장에 채워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두터운 책들 사이에서만큼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전집에 대한 관심은 생기지 않았다.

올 2월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워크룸프레스’의 새로운 문학 총서 ‘제안들’은 문고본과 양장본을 합쳐놓은 것 같은 모양새이다. 크기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문고 크기에 책마다 다른 단색의 하드커버, 표지를 감싼 띠지 위에 새겨진 큼직하게 시원시원한 타이포그래피와 반대로 책등에 박힌 작고 촘촘한 금박의 글씨들도 서로 잘 어울린다. 내용을 떠나 그저 책의 표면만으로도 손이 갈만큼 군더더기 없이 당당하다.

원래 ‘워크룸프레스’ 이전에 ‘워크룸’은 '안그라픽스'에서 일하던 젊은 디자이너들이 의기투합한 디자인 스튜디오로 출발했고 시각예술 작가들과도 흥미로운 작업들을 시도해왔던 곳이다. 나는 ‘워크룸’초창기인 2005년 우연한 기회로 이 그룹을 알게 되었는데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다수가 저예산으로 제작되던 미술계의 출판물에서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던 편집이 가능한 스튜디오였기에 너무나 인상적이었다(사실 그 후로 알게 된 이들의 인간적인 매력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많다).

'워크룸' 안의 또 다른 그룹인 '워크룸프레스'는 2011년 시작되었다. 워크룸 구성원 중 오랜 친구이기도 한 김형진과 박활성이 디자이너와 디자인 전문 편집자로서 콤비를 이뤘고, 총서기획에는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유럽문학을 담당했던 김뉘연 편집자가 가세했다.

‘제안들’이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분명하다.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고전'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권의 숨은 작가들, 이미 알려진 작가들의 생소한 작품들, 반드시 있어야 함에도 번역본이 없던 책이다. 나탈리 레제,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들이다. 작품 범위도 시와 소설 외에 산문 비평 전기 일기 편지 등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장르까지 포괄한다. 어떤 판본을 선택했는지 명시한 양질의 정교한 번역과 책마다 다른 독특한 형식의 번역 후기도 이 시리즈를 읽는 묘미이다.

'워크룸프레스'의 문학 총서 ‘제안들’에는 다음과 같은 소개글이 붙어있다. “일군의 작가들이 주머니 속에서 빚은 상상의 책들은 하양 책일 수도, 검정 책일 수도 있습니다. 이 덫들이 우리 시대의 취향인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제안들’은 조르주 바타유의 연보에 등장하는, 그가 펴내려 했으나 결국 출간하지 못한 총서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리고 ‘일군의 작가들’, ‘주머니’, ‘상상’, ‘하양’, ‘검정’, ‘덫’, ‘우리 시대의 취향’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었거나 출간되지 않은 총서명들이라고 한다.

문장들 사이로 편집자들의 장난기 섞인 얼굴이 그려지며 웃음이 터진다. 며칠 전 나는 ‘제안들’ 중 다섯째인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계속되는 무’를 구입했다. 그간 마구 부려먹던 신체가 말썽을 부려서 얼마간 입원을 앞두고 마련한 준비물이다. 부드러운 표지를 쓰다듬으니 괜스레 배가 부르다. 다시 생각해보니 전집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정민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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