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관련 기록은 문화콘텐츠 보고
광해군일기 모티프 영화 광해 좋은 예
20년째 번역 중인 승정원 일기 인력·예산 부족 번역률 9.6%불과
석·박사과정 등 맞춤형 양성 통해 완역기간 50년까지 단축시킬 것
“우리나라의 기록유산은 무궁무진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해 낼 보고입니다.”
취임 넉 달째로 접어든 한국고전번역원 이명학(59ㆍ성균관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원장은 5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승정원 일기’ 등 고전이 하루 빨리 완역돼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이 원장은 “예를 들어 1,000만 관객이 본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도 광해군일기에는 누락되어 있는 보름치 기록에 상상력을 덧댄 작품”이라며 “그만큼 번역본을 빨리 세상에 내놔야 해석 및 재해색 과정을 거치며 무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번역원이 역점을 두고 번역작업을 벌이고 승정원 일기는 조선시대 모든 왕명과 상소, 그리고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고스란히 담긴 288년(인조~순종4년)의 기록이다.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상황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최고의 기록 유산 중 하나로 꼽힌다.
문제는 지금 여건에서 2억5,000만 자에 달하는 승정원 일기를 완역하려면 무려 93년이 걸린다는 점. 올해로 20년째 승정원 일기를 번역하고 있는데, 번역진척이 9.6%에 불과하다. 그만큼 방대한 자료들에 비해 인력과 예산이 열악하다는 뜻. 그래서 이 원장은 “번역 시스템 개편을 통해 완역 기간을 50~57년 까지 단축시키겠다”고 했다.
기존에는 원 문서에서 틀린 글자를 수정(교감)하고 문장 구분 및 기호를 첨삭(표점)하는 1차 작업을 거친 뒤 한문을 한글로 번역했다면, 앞으로는 별도의 1차 작업 없이 번역에만 집중해 하루라도 빨리 번역본을 내놓겠다는 설명이다. 연구원 회의를 거쳐 번역 시스템 정비를 마쳤고 9월부터 본격 시행 예정이다.
이를 위해 맞춤형 전문 번역가 양성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원장은 “1차 과정을 생략한 채 양질의 번역본을 내려면, 번역가 1명이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제도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번역원이 자체 운영하는 고전번역교육원(비학위)을 정식 석ㆍ박사 과정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선 최소 연간 5억원의 예산이 더 필요한데, 여기에 현 130여명인 번역가 수를 늘리면 기간을 더 단축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재 번역원은 승정원 일기 외에 조선왕조실록, 일성록(정조의 일기) 등도 번역 중이다.
이 원장은 북한과의 학술교류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은 이미 1981년 조선왕조실록을 ‘이조 실록’이란 이름으로 완역한 반면, 우리는 한발 늦은 1995년에야 번역을 마쳤다. 북한에는 민족고전연구소(사회과학원 산하)에 100~150명 가량의 연구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분단 이후 고전 해석에 관한 학술교류가 없어 남북한 연구진들의 번역 수준과 실태 등을 가늠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때문에 이 원장은 최근 민족 학술대회 개최를 북측에 제안했다고 한다. 이 원장은 “북한 지역 기행문 등 공동 작업해야 할 기록들이 많다”며 “남북이 정치이념 및 이해득실을 넘어 역사의 과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젊은 세대의 한글 습득 실태를 지적하며 한자 조기교육도 강조했다. 발음은 비슷하지만 엄연히 철자와 뜻이 다른 괴도(怪盜)와 궤도(軌道)를 구분 못하거나, 희한(稀罕)하다, 상쇄(相殺)하다 등의 맞춤법을 틀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심지어 대학생들도 ‘현재(現在)’를 ‘현제’로 오기한다고 한다. 이 원장은 “우리말 가운데 약 70%가 한자며, 특히 구어체 단어 중에는 한자가 80% 이상”이라며 “한자를 많이 알자는 게 아니라, 우리말을 정확히 사용하자는데 한자 교육의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앞서 2007년부터 중국과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현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글 백일장‘을 개최해 우수학생을 성균관대 대학원에 입학토록 하는 등 한글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2012년 대학교수로는 처음 대한민국 스승상(교육부 주관)을 수상했다.
글ㆍ사진=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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