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깃든 전자사전·넷북 딱히 쓸모 없지만 버리긴 아까워
기업들은 신제품 쏟아 내고 소비자는 유행 좇다 보니 멀쩡한 계륵 아이템 '차곡차곡'
무작정 버리는 것과 무작정 쌓아 두는 것, 어느 쪽이 옳은 걸까?

작동은 되는데 속도가 느려터졌어. 겉으론 말짱해 보이는 넷북 말이야. 전자사전은 왜 샀는지 몰라. 스마트폰에 다 들어있는 기능인데. 이 MP3 플레이어는 주변기기랑 전혀 호환이 안 돼. 유행에 한참 뒤쳐진 디자인은 또 어떻고.
직장인 유지숙(40)씨는 지난 주말 쓸모 없는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수납장 서랍 속엔 다양한 연식과 색상의 폴더폰과 스마트폰들이 흩어져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비디오테이프를 비롯해 부담스런 크기의 디카와 휴대용 게임기 등. 작동 여부가 불투명한 구닥다리들 틈에서 소속불명의 충전기와 케이블이 뒤 엉킨 채 똬리를 틀고 있었다.
“휴우~” 보관하고 있으면 한번쯤 쓸 수 있을 것 같은 물건들. 딱히 쓸모는 없지만 막상 버리자니 아깝다. 그러고 보니 ‘계륵(鷄肋) 아이템’이란 말이 은근 어울린다. 진보된 기술과 디자인으로 무장한 신제품이 등장하면 구식은 퇴출되기 마련이다. 수많은 디지털 기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요즘 서랍 속 계륵 아이템의 숫자도 점점 빠르게 늘어간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1980년대 한 가전업체는 제품 수명 10년을 자신했고 소비자는 인생을 살면서 이를 직접 확인했다. 물건이 귀했던 당시 수명도 다하기 전에 버리거나 교체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요즘은 쉽게 사고 쉽게 버린다. 품질보다 유행을 따라가는 소비패턴이 ‘멀쩡한’ 계륵 아이템의 증식을 부추긴다. 기업의 마케팅 전략은 유행을 좇는 소비자의 욕구를 구매로 유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몇 가지 새로운 사양을 추가해 기존 제품을 구형 모델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최근 한 시장조사 기관은 디지털 기기의 교체 주기가 소비자의 의지와 상관 없이 너무 빨리 찾아온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욕망의 무한한 확장으로 인해 사회 전체가 매력적이면서 수명이 짧은 물건들로 재구조화 되고 있다”프랑스 사회비평가 질레스 리포베스키는 현대의 소비현상을 이렇게 진단했다.
발전을 향한 선상에서 낡은 기술이나 제품을 한 없이 껴안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과정에서 남겨지는 파편 또한 필연적 결과물이다. 무작정 버리는 것과 무작정 쌓아두는 것, 어느 쪽이 옳은 걸까? 오래된 것의 가치와 추억을 보관하는 적당한 기준은 무엇일까? 이사할 때 거추장스럽지 않은 정도? “어릴 땐 카메라나 한정판 휴대폰처럼 어렵게 구매한 물건에 애착도 많았고 소장하는 자부심도 있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물건으로 바꾸는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아요”서랍 속 50여 개의 아이템 중 이 날 유씨가 처분한 것은 96MB, 128MB 메모리카드와 플로피 디스크 몇 개가 전부였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그래픽 = 강준구기자 wldms4619@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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