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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기획 ‘나의 어머니’ - 테너 이현영 [엠플러스한국]

입력
2014.08.04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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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기획 ‘나의 어머니’ - 테너 이현영 [엠플러스한국]

40대 아들 위해 15년 동안 도시락 싸준 어머니

‘초보 엄마에 덤벙대는 아들’.

내 어머니와 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는다면 저런 제목이 딱 어울릴 것 같다. 스물다섯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당신의 고백처럼 첫 아이라 아무 것도 모르고 열정만으로 키웠고, 나는 나대로 천방지축이었다.

자전거 4대를 잃어버린 덤벙

나는 중학교 때까지 자전거를 4대나 잃어버렸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오락실에 ‘잠깐’ 들렀다가 도둑을 맞았다. 그것도 처음엔 인식도 잘 못하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아, 내 자건거!” 하기 일쑤였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혼난 건 어머니의 자전거를 도둑맞았을 때였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시던 작은 공장과 연계된 가게를 여셨다. 어머니는 그 자전거를 타고 볼일을 보셨다. 이를테면 영업용 자전거를 잃어버린 거였다. 어머니는 “내가 생각해도 안 죽을 만치 때렸다”고 말씀하신다. 그 정도로 나는 주의가 산만했다.

나는 자주 맞았다. 때로 원망했다. 마음에 상처가 된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최선을 다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언성을 높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성악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해주신 분도 어머니셨다. 내게 처음 음악을 권한 분은 음악선생님이었다. 내가 학교 중창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하루 만에 승낙을 하셨다.

아버지는 극구 반대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 굶었다. 아버지는 “니 마음대로 해라!” 하면서 반 승낙을 했다. 어머니는 루치아노 파바로티만큼 유명해질 보증을 받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열심히 내 뒷바라지를 하셨다. - 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장학금 한번 타지 못했다.

15년 동안 4시30분에 기상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1990년 중후반이었다. 1995년 어머니가 식당을 여셨다. 아버지가 허리를 다쳐서 공장 문도 닫고 집에 꼼짝 않고 드러누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돈을 마련하려고 식당을 시작하신 것이었다. 나는 1996년 어머니만 믿고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고생의 연속이었다. 1997년 IMF가 터졌다. 나는 국내 사정은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귀국했다. 그때가 98년이었다.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건강에 이상이 왔다. 급성당료로 석 달 만에 몸무게가 30kg 넘게 빠졌다.

어머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치료책을 다 동원했다. 누군가 인진쑥이 좋다고 하자 어머니는 매일 달여서 나에게 먹였다. 차도가 있었다. 이 외에도 내 음식은 항상 어머니가 장만하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뇨가 발병한 뒤 지금까지 항상 내 도시락을 싸주신다.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4시 30분에 일어나 밥을 해서 내 도시락을 싸는 것으로 시작한다. 15년 동안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70을 넘긴 나이에도 어머니는 그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늘 아들을 챙긴다.

아들 딸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모든 것이 어머니 덕분이었다. 아직도 티격태격할 때가 많지만, 아픈 몸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얻기까지 어머니의 기도와 보살핌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요즘 들어 공연 때마다 부르는 노래가 하나 있다.

이 세상에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 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늦둥이를 낳아 길러보니 노래이 가사가 절절하게 와 닿는다. 내가 첫 자식이어서 ‘교육학적으로 봤을 때’ 실수한 부분이 많지만 결국은 다 나 잘되라고 그러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첫 자식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이렇게 표현하신다.

“열 손가락 깨물아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그래도 엄지가 그중 제일 아프다. 아무 것도 모르고 키운 자식이라 실수한 것도 많고 미안한 것도 많기 때문이거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자식 잘되라고 빌어주는 그 마음 덕에 내가 이만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니까.

다행이 나는 부모님 모두 살아 계신다. 언제까지 내 곁에 계셔 줄지는 모르겠지만, 살아계신 동안은 뒤늦게 깨달은 그 마음에 보답하며 살 것이다. / 정리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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