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팝아티스트 이하 父情先巨展 2012대선 풍자해 만든 한자조어
세월호·아베 등 이슈 작품에 담아 관객에게 낙서·훼손까지 유도
"다 어우러져야 작품 완성된 것"
서울 종로구 벙커원 카페 지하갤러리에서는 지금 좀 특이한 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시사 팝아티스트 이하(46ㆍ본명 이병하)씨의 ‘부정선거전(父情先巨展)’이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이 전시회 제목에 대해 이씨는 “마음대로 조합한 사자성어”라고 했다. 한자를 그대로 풀어보면 ‘아버지에 대한 정이 크게 앞섰다’는 뜻. 그는 2012년 대통령선거를 풍자해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귀뜸했다.
그렇다고 정치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일본 아베 총리의 망언, 김연아 선수의 눈물 젖은 은메달 등 그때 그때의 이슈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 실사 인화한 뒤 목판에 붙여 넣은 ‘그림일기’ 40점이 걸려있다. 또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축구선수 박지성 등 유명 인사의 인물화를 조명과 함께 전시한 작품 10점, 그 외 일반 작품 등 70여 점이 전시됐다.
무엇보다 인물화에 관람객들의 낙서가 가득한 점이 눈에 띄었다. 정확하게는 그가 낙서를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실제로 작품 옆에는 ‘낙서를 한 뒤 인증샷을 이메일로 보내면 티셔츠를 드립니다’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심지어 낙서를 넘어 아예 작품을 훼손하는 관람객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정작 이씨는 “낙서나 훼손 또한 작품을 감상하는 하나의 형식”이라며 “내 작품은 관람객들의 낙서까지 어우러져야 비로소 완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회 폐막 전날(15일)에는 사인회를 겸한 ‘게릴라 전시회’도 계획 중이다. 작품을 이동이 간편한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한 뒤, 특정 장소에서 1~2시간 전시하고 재빨리 장소를 옮겨 전시하는 방식이다. 서울역과 광화문광장, 청와대 입구를 전시 장소로 할 예정이다.
당초 이씨는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제작자였다. 2009년 미국 유학시절 슬램가를 지나는데 누군가가 건물에서 반대편 건물 벽면으로 빔 프로젝트를 쏘는 광경을 목격했다. 총을 든 보안관 모습의 그림이었는데, 마치 어둡고 살벌한 거리를 밝히는 한줄기 빛 같았다고 한다. “작은 그림 한 장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목표와 가치를 설정해 주는 등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이후 그는 세상에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장 김정일, 후진타오 등 세계 지도자들을 풍자한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와 ‘꽃미남 탈레반 병사’ 작품이 미국 내에서 주목 받았다. 2011년 귀국 후엔 본격적으로 시사 팝아티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환수를 위한 특별전 ‘왜 나만 갖고 그래’가 큰 반향을 얻었다. 정치풍자 포스터를 부착했다가 기소되는 곡절도 있었다.
그는 가장 애착 가는 작품으로 ‘고래가 되어라’와 ‘초상화’를 꼽았다. 특히 초상화에는 폐휴지를 팔아 아흔의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를 봉양하던 60대 할머니의 애처로운 사연이 담겨 있다. 두 어머니의 사진 조차 찍을 여유가 없었던 이 할머니는 이웃이었던 이 작가에게 어머니 초상화를 부탁했는데, 작품 완성 후 수 주일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결국 이 초상화가 영정사진이 되고 말았다. 세월호 사건을 그림일기로 표현한 ‘고래가 되어라’를 그릴 땐 1주일에 걸친 작업기간 내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작품 색깔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정권에 대한 견제와 비판은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인데 각종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예술가가 제격”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특히 시사작가가 잃지 말아야 할 덕목으로 순수성과 작품성을 강조했다. 예술가의 머리와 양심이 시키는 대로 예술 작업을 해야지, 세태의 흐름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자신에 대해 “현 미술계의 정형화된 시스템에도, 상업 가치를 추구하는 시대에도 뒤쳐지는 편”이라면서 “그래도 실패한다면 멋지게 실패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ㆍ사진=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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