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헌책방에서 산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다시 읽고 있다. 쉽지는 않다. 1980년대에 출판된 것이라 문투가 구식이고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도 더러 발견된다. 글자는 깨알 같고 페이지의 상하좌우 여백이 얼마 되지 않아 눈도 피곤하다. 시중에 나와 있는 최신 판본 중 하나를 새로 살까 잠시 고민했지만, 십여 쪽을 넘기면서부터 그냥 이 낡은 책을 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책에 스민 몇 겹의 시간이 내용 못지않게 마음을 건드린 까닭이다. 볼펜으로 밑줄을 치고 생경한 글씨의 메모를 남긴 것은 이 책의 옛 주인이다. 그 흔적들을 피해 연필로 선을 긋고 뭐라 뭐라 적어 넣기도 한 것은 대략 이십 년 전의 나다. 그 낙서가 하도 감상적이라 애틋하다 못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옛 주인의 볼펜과 예전의 내 연필을 피해 색연필을 든다. 표시를 해두고 싶은 부분에 물결선을 넣고 페이지의 귀를 접는다. 종이 위에 퇴적된 마음의 지층들이 겹겹 뚜렷하다. 맨 밑에 20세기 초의 작가가, 그 위에 번역자와 편집자가, 또 그 위에 80년대의 독자와 90년대의 독자와 2014년의 독자가 차례로 흔적을 쌓고 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책은 서점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 합하면 수만 권도 넘지 않을까. 그러나 마음의 지층이 이런 무늬로 남아 있는 책은 나에게만 있다.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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