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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왜 야당은 번번이 지는가

입력
2014.08.0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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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역사에서 진보주의는 합리적 이성과 계몽사상의 소산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인 콩도르세는 “인류의 미래 상황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다음 세 가지의 주제로 요약될 수 있다. 국가간 불평등의 제거, 각 국가내의 불평등의 제거, 그리고 인류의 진정한 완성”이라고 진보에 대해 표현했다.

보수와 진보를 추상적으로 대별한다면 보수주의자들은 현재를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역사적 경험의 집적으로 보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현재를 미래의 출발점으로 본다. 보수와 진보의 보완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한국적 특수성에 비추어본다면 이러한 사변적 구분이 일견 정치사회적 배경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가 관통하고 있는 개념은 우리의 경우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이 말은 1992년 빌 클린턴이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을 누르는데 큰 힘이 되었던 선거구호다. 정치의 정의는 말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하다. ‘가치의 권위적 배분’, ‘갈등의 조정’ 등 정치에 대한 고전적 정의와 결국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는가’에 대한 쟁투라는 권력정치적인 정의 등은 정치의 일면만을 드러낸다. 정치가 놓쳐선 안 되는 것은 민생이며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의 증진이다. 그래서 정치는 경제와 맞닿아 있다.

7·30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참패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는 무원칙 전략공천이다. 하지만 그건 부차적 패인일 뿐. 새정치연합이 지금 보다 근본적으로 성찰할 지점은 진보적 의제를 민생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심각한 ‘민심 난독증(難讀症)’이다. 선거 후 새정치연합의 상임고문단 회의에서 나온 진단은 당이 민심을 파악 못하고 진부한 운동권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와 반민주가 치열하게 대치했던 권위주의 시대의 이분법적 인식의 틀에 갇혀있는 야당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변증법적으로 진화해야 할 당위를 대변하고 있다.

지난 대선 이후 새정치연합의 패인 분석은 역시 정치적 진영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좌우, 중도의 이념적 노선 차원에서 패인을 분석한다면 문제의 핵심을 꿰뚫지 못한다. 상대적 박탈감과 불평등, 비정규직 문제, 불안한 노후, 취업 전쟁 등 경제사회적 갈등 요소들을 해소할 단초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근본부터 성찰할 때 유권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 먹고 사는 민생에 천착하지 않는 진보는 위장된 진보일 뿐이다. 야당이 사회경제적 균열을 표출하고 대표해 낼 때 당의 정체성의 확립을 통한 지지자들의 결집도 도모할 수 있다.

새정치연합과 새누리당 모두 보수정당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경제적 현안에서 새정치연합이 새누리당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적 의제를 앞세운다. 18대 대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이슈를 선점하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기술의 차원이다. 보수의 결집이 강고해 보이나, 사회의 혁신과 변화에 희망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 어림잡아 절반은 된다. 그런데도 야당은 2010년 지방선거 이후 각종 선거에서 번번이 졌다. 2013년 대선 패배 이후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백척간두 진일보의 각오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자세로 민주당을 바꾸겠다”고 했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재가 미래의 출발점’이란 진보의 관점에서 제1야당과 진보 세력이 실천적이고 생활밀착형 민생 의제로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새정치연합과 진보정당이 합치는 ‘빅 텐트론’이니 ‘진보통합론’이니 하는 진부한 야권재편론을 꺼내 들기 전에 새정치연합과 진보정당들은 민생을 위해 어떠한 정책연합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정책을 바탕으로 한 민생 입법연대가 유권자들의 동의에 입각한 화학적 융합으로 연결될 때만이 연대와 통합의 당위성을 인정받는다.

정당의 존재목적은 정권 획득이며 당의 강령과 정체성도 부단한 진화를 통해서 정립된다. 새정치연합의 비상대책위원장과 위원의 구성보다 그래서 민생 진보가 더 중요하다. 7·30 재보선의 참패 이후 또 다시 지난 대선 패배 후의 말 뿐인 ‘혁신’만 반복된다면 새정치연합은 정권교체와 정치쇄신보다는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집단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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