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트리 밴드 집안 막내
15살 때 병으로 가수 활동 접어
찰리 파커와 만나 재즈에 눈떠, 독학으로 더블베이스 익혀
현실 참여적 음악 활동
스페인 내전 등 다룬 앨범부터 체 게바라 위한 연주까지
반전ㆍ저항 정신 담아 내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진실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주체와 대상이 더불어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행복이란 게 너무 자의적이라면 아름다워야 한다고 바꿔 말해보자.
사랑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어쩌면 부차적이다. 중요한 건, 사랑이 됐든 투쟁이 됐든, 동력을 유지하고 관계를 매개하는 형식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이라 여긴 것들이 사실은 하나의 양상일 뿐이고 정작 본질에 닿아있는 것은 형식이었음을, 우리는 긴 시간 뒤- 그래서 뭔가가 완성되거나 깨어진 뒤에 깨닫곤 한다. 우리는 섣부른 화해나 추궁의 논리보다 과연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오래 집요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지난 11일 세상을 떠난 재즈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의 삶과 연주는 저런 질문과 생각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재즈와 더블베이스를 사랑했고, 음악을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재즈가 그러하고 음악이 그러하듯, 저항과 자유와 해방의 갈망으로 자주 악보와 맞서고 세상과 맞섰으나 그런 맞섬 역시 스스로 추구한 아름다움의 한 양상이었다. 그의 사랑은 그러니까, 아름다움에의 갈망을 공유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음악이 그러하듯 자유도 사랑도 그에게는 ‘방편’이었다. 더불어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편. 음악을 통해 함께 행복해지고자 했다. 그 행복이 과연 이루어졌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웠다.
그는 지난 달 생애 마지막 음반을 발표했다. 음악적 반려로서 근 50년을 함께 한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과의 듀엣 음반‘라스트 댄스(Last Dance)’다. 음반의 마지막 트랙 두 곡의 제목은 ‘Every Time We Say Goodbye’와 ‘Goodbye’. 요컨대 그 음반은 찰리 헤이든의 기나긴 이별의 인사였다. 젊은 시절 심취했던 느와르의 한 장면, 특히 레이먼드 챈들러 원작의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며 그의 내면은 조금은 스산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누릴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고 있었다.
18살이던 55년 베이시스트로 재즈계에 데뷔한 이래, 또 50년대 말 재즈의 주요무대였던 LA와 뉴욕에 진출한 이래, 그는 근 60년 동안 당대의 내로라하는 숱한 거장들과 수많은 음반을 냈고, 스스로 거장이 돼 자신만의 연주라 할 만한 영역을 개척했다. 재즈 학교를 열어 걸출한 제자들도 길러냈다. 그렇게 한 세월 멋지게 논 뒤, 자신이 사랑한 음악으로 마지막 춤을 추고 떠나는 삶은 드물지 않은가. 스산했겠지만 그 정도면 행복했을 것이다.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재즈차트 1위(7월 30일 현재 3위)를 기록했다. 그는 7월 11일 떠났다. 향년 76세.
찰리 에드워드 헤이든(Charlie Edward Haden)은 1937년 8월 6일 미국 아이오와주 세넌도어의 한 음악가 집안에서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가족은 ‘헤이든 패밀리 밴드’라는 이름의 컨트리웨스턴 그룹으로 활동하며, 매일 두 차례 지역 라디오쇼에 생방송으로 고정 출연할 만큼 유명했고 미국 중서부지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방송국에서 장비들을 매일 우리 집 거실로 싣고 왔어요. 우리 가족은 아침 4시면 일어나 소를 먹인 뒤 곧장 쇼를 준비하곤 했죠.”가족이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로 이사한 뒤에는 방송국에서 아예 생방송 장비 일체를 그의 집 거실에 설치해뒀었다고 그는 말했다.(The Atlantic online, 2000.8)
그의 음악 수업은 그러니까 엄마 뱃속에서 시작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엄마의 자장가를 허밍으로 따라 불렀고 그게 그럴싸했다고 한다. 그는 생후 22개월 만에 패밀리밴드의 ‘가수’로 데뷔하고, 실제로 방송에도 출연한다. 그는 15살이던 1952년 소아마비가 발병할 때까지 ‘카우보이 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가스펠 곡에 요들을 부르던 밴드 싱어였다. 그가 앓은 병은 얼굴과 목 근육이 위축되는 병이었고,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다. 50년대 들면서 헤이든 패밀리 밴드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소설 콘트라베이스에서 처음부터 콘트라베이스로 음악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으며 다들 우연과 실망을 통해 그 악기를 만나게 된다고, 한 애증의 베이시스트의 넋두리를 통해 말했다. 물론 작중 인물은 국립오케스트라 단원인 클래식 베이시스트다. 클래식 마니아들은 ‘연주의 전체를 떠받치는 기초’로서 콘트라베이스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지 수긍한다지만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주목 받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재즈에서 베이스의 비중은, 상식적 이해 안에서도 클래식에서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쥐스킨트의 저 베이시스트 역시 “재즈밴드에서 베이스가 빠지면 연주음은- 회화적으로 표현해서- 폭발음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다른 악기의 연주자들은 일제히 무기력해지고 말겠죠”라고 인정한다.
찰리 헤이든이 하고많은 악기 가운데 그 크고 둔중한, 원초적 저음의 더블베이스에 꽂힌 계기는 복합적일 것이다. 다만 그는 어려서부터 라디오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었고 특히 바흐의 협주곡에서 들려오는 베이스의 음색에 사로잡혔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유명한 재즈 비평가인 프랜시스 데이비스는 2010년 ‘월간 아틀란틱’에 기고한 글에서 헤이든의 타고난 화음 감각을 언급하며 그가 했던 말을 전하고 있다.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베이스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음악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진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베이스는 모든 걸 납득시키곤 했다.”그 즈음 찰리는 인근 도시 오마하에서 열린 비밥 색소폰의 대가 찰리 파커의 재즈 콘서트를 본다. 2003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51년 ‘버드’(찰리 파커의 애칭)의 공연을 보기 전까지 내가 아는 건 컨트리뮤직밖에 없었다”고 했다.(뉴욕타임즈, 2014.7.11)
그는 독학으로 더블베이스를 시작했고, 18살 무렵 스프링필드에서 시작된 미국 최초의 유선방송 음악쇼 ‘오자크 주빌리(Ozark Jubilee)의 베이시스트로 일할 만큼 실력을 쌓는다. 그리고 만 스무 살이 되던 1957년, LA로 음악 유학을 떠난다. 그는 웨스트레이크 음악대학에서 베이스를 공부하며 폴 블레이, 아트 페퍼, 햄프턴하우스 등 뮤지션들과 활동을 본격화한다.
그리고 2년 뒤인 59년 전설의 알토 색소포니스트인 오넷 콜맨을 만나 그의 콜맨 콰르텟에 합류하고, 재즈 아방가르드의 본류인 뉴욕으로 진출한다. 오넷 콜맨은 존 콜트레인과 함께 60년대 재즈세계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하지 않은 뮤지션. 찰리는 콜맨의 파트너이자 ‘프리 재즈’의 음악적 지향을 공유했던 동지로서, 콜맨이 프리재즈의 개조(開祖)로 불리게 되는 긴 세월을 함께 헤쳐나갔다. 그는 59년 발표한 콜맨의 선언적이고도 기념비적인 앨범 ‘The Shape of Jazz to Come(새로운 재즈의 양상)’등에 가담했다. 둘이 연주한 ‘Lonely Woman’같은 곡은 지금도 자유분방한 재즈 하모니의 전범으로 손꼽힌다.
두 사람이 죽이 맞은 것은 자유로운 연주에 대한 생래적인 지향, 혁명적이고 저항적인 스타일 덕일 것이다. 요하임 베른트는 역저 재즈북에서 콜맨의 초기 연주는 음과 화성, 코드의 진행이 너무 자유분방(?)해서 그를 받아줄 뮤지션조차 없을 정도였다고 썼다. “콜맨은 스스로가 음악의 규칙은 외부에서 부과한 화성 원리에 기초하기보다 뮤지션 자신 안에서 찾아야 된다고 느꼈다.”(214쪽) 그것은 즉흥재즈의 대가인 헤이든의 생각이기도 했다. “헤이든은 재즈에서 베이스 연주의 화성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미리 정해진 화성 구성에 따른 코드 변화를 연주하는 것을 줄기차게 회피한 최초의 베이시스트였지만, 대신에 독자적인 멜로디의 흐름에서 탄탄한 화성의 토대를 만들어냈다.”(580쪽)
헤이든은 그렇게 자신의 연주를 악보의 억압에서 풀어냄으로써 비밥 재즈의 전통 안에서 리듬파트의 역할에 갇혀 있던 더블베이스를 해방시켰고, 그럼으로써 재즈를 해방시켰다. 재즈를 더 풍성하게, 더 재즈답게 확장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헤이든의 고집은 음악에 대한 그의 철학과 연주자로서의 도저한 자신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는 음악을 장르로 구분하는 모든 시도에 반발했다. 2009년 그는 자신의 가족과 재즈 뮤지션들이 합심해서 만든 컨트리 앨범 ‘Rambling Boy’발표 직후 인터뷰에서 컨트리뮤직과 재즈는 둘 다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의 독자성과 정체성, 그리고 인정받고자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다르지 않은 음악이라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69년 작곡가인 카를라 블레이(Carla Bley)와 함께 그 유명한 빅밴드 재즈그룹‘Liberation Music Orchestra(LMO)’를 조직, 뚜렷한 좌파 지향의 음악 활동을 펼친다. 베이스의 그를 비롯, 호른 색소폰 튜바 트럼펫 기타 드럼 등 12명의 멤버가 가담한 LMO의 집단적이고도 실험적인 연주는 딕시풍의 음악서부터 월드뮤직, 프리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울렀고, 때로는 미국 국가나 독립전쟁 공화국 군가 등을 패러디하면서 시대와 정치를 풍자했다. 그는 71년 콜맨과의 유럽투어 중 포르투갈 리스본의 1만여 청중 앞에서 자신이 작곡한 ‘Song for Che(체 게바라를 위한 노래)’를 연주, 포르투갈 경찰에 의해 5시간 동안 구금되기도 한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의 독립운동을 부추겼다는 게 이유였다. LMO는 스페인내전을 주제로 한 첫 앨범(69년, 타이틀도 LMO)을 비롯해 칠레 저항운동, 살바도르 내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등의 주제를 담은 4장의 음반을 냈는데, 헤이든은 그 음반들을 미 공화당 집권기에 발표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87년부터는 필름 느와르의 주제곡서부터 팝발라드, 비밥스타일의 재즈 등 30,40년대의 화려하고 로맨틱한 복고풍 음악을 연주한 ‘콰르텟 웨스트(Quartet West)를 시작했다. 색소폰의 어니 와츠 , 피아노의 앨런 브로드벤트 등 쟁쟁한 뮤지션들이 가담한 콰르텟 웨스트는 20년 넘게 활동하며 모두 8장의 음반을 냈다.
헤이든은 96년 걸출한 재즈 멜로디스트인 기타리스트 팻 매스니(Pat Metheny)와 함께 재즈 서정의 한 극단으로 평가 받는 음반 ‘Beyond the Missouri Sky(미주리의 하늘 너머)’를 발표, 생애 첫 그래미상을 받는다. 그는 쿠바 출신의 피아니스트 곤잘레스 루발카바와 작업한 두 음반 ‘Nocturne(야상곡, 2001)’과 ‘Land of the Sun(태양의 땅,2004)’으로 두 번 더 그래미상을 탔고 2012년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NEA의 재즈 마스터에 등극한 것도 그 해였다.
그는 82년 재즈학교인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nia Institute of the Art)를 설립, 재즈 교육자로도 활약했다. 그에게 음악은 나은 삶을 이루고 또 인류와 공유하기 위한, 스스로 택한 가장 아름다운 형식이었다. 그는 겸손과 아름다움에의 헌신, 누림이라는 삶의 가르침을 음악에서 배웠노라고, 명상과도 같은 즉흥연주의 한 순간, 어제도 내일도 없는 현재의 한 순간을 통해 배웠노라고 했다. “오직 현재만 존재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아름다운 순간에 당신은 이 거대한 우주의 하찮은 존재일 뿐이라는 진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조차 잊게 되는)바로 그 순간, 당신은 스스로가 정말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NPR, 2014. 4.18) 2002년 색소포니스트 마이클 브레커와의 앨범 ‘American Dreams’의 해설에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나는 탐욕과 잔혹함이 사라진 세상, 모두가 동등하고 고귀한 사람들의 세상, 마틴 루터 킹과 자유의 여신상이 지향하던 아메리카를 꿈꾸어 왔습니다. 공감(compassion)과 창의적 지성, 삶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를 꿈꾸는 모든 이들,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의 미래에 내 음악을 바칩니다.”
2008년 9월 그는 30년을 함께 산 아내 루스 캐머런(가수), 모두 음악가로 성장한 1남3녀의 아이들, 그리고 팻 매스니, 엘비스 코스텔로, 벨라 플렉 등 그의 재즈 파트너들과 함께 ‘Rambling Boy(떠돌이 소년)’란 앨범을 발표한다. 30, 40년대 헤이든 패밀리 밴드 시절의의 래퍼터리를 늙은 ‘카우보이 찰리’와 뉴 헤이든 패밀리가 더 넓고 깊은 버전으로 부른 거였다. 거기에는 옛 녹음에서 채록한 22개월 된 찰리의 인사말과 71살 찰리의 ‘오 새넌도어(Oh Sehnandoah)’도 수록됐다.
음악을 통해 그는 그렇게 자신의 어린 내면과도 넉넉하고 아름다운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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