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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교황의 방한은 이벤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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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교황의 방한은 이벤트가 아니다

입력
2014.08.0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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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며 한 말은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이었다. 그의 말대로 한국 천주교는 순교자의 피로 세워졌다. 확인된 순교자만 2만명에 달한다니 세계 가톨릭 역사에 이런 나라가 없다.

한국 가톨릭은 수용 과정도 이례적이다. 유럽 가톨릭이 권력과 부에 취해 급속히 무너질 때 한국은 가톨릭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유럽 이외 국가 중 현지인이 스스로 가톨릭을 받아들인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 가톨릭의 이런 특이한 현상은 조선 사회의 불평등과 완고함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 사회는 급속도로 기울었지만 지배 질서는 도리어 수구적으로 변해갔다. 몰락한 남인과 중간계급, 그리고 하층계급과 여성이 천주교에 빠져든 것은 당시 사회가 그만큼 불평등하고 억압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톨릭이 배척되고, 유럽인이 중남미에서 현지인을 학살하며 가톨릭을 둘러댈 때 조선에서는 천주교가 평등과 인권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사람이 더 공평한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 목숨을 바쳤다. 그러니 초창기 천주교에는 약자의 소망, 변화에 대한 염원 그리고 강한 사회성이 있다.

그러나 천주교가 늘 그런 정신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다.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천주교 고위 인사들은 그의 행위를 일반적인 살인으로 보았고, 그가 신자가 아니라고 부인했으며, 옥에 갇힌 안중근의 방문 요청을 거절했다. 한국인 최초의 주교인 노기남 주교는 경성교구장 취임사에서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자”고 외쳤고,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한 헌금을 주도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는 천주교 인사가 일곱 명이나 포함돼 있다. 지역감정 조장의 원조인 이효상 전 국회의장은, 이문희 대주교를 아들로 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대통령자문기구로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도 천주교 사제가 참여했다. 박홍 신부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대지 못한 채 주사파 발언을 쏟아내며 1990년 한국 사회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고 갔다. 많은 천주교인이 양심을 지키고 사회 불의를 타파하려 했지만, 사회의식이 없거나 자신 혹은 자신을 둘러싼 세력의 이익을 위해 반대로 움직인 천주교인 또한 이처럼 얼마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의미가 있는 것은 그의 방문이 한국 천주교회가 초기 정신을 회복할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황 또한 세상의 변화를 염원하고 약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차단하고 투기행위를 근절하는 등의 노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라며 규제 없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독재’로 규정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사상은 틀렸지만 내가 살면서 만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개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나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다”고도 했다. 그가 “기부의 문화가 아닌 노동의 문화를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은 부자나 권력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자며 시혜를 베풀 듯 자신의 돈 일부를 떼어주는 것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는 만큼 구조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뜻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 사회는 식민통치, 민족전쟁, 압축성장을 거쳐 이제 10위권의 경제대국을 넘보고 있지만 좌절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교황의 인식이나, 평등과 인권을 앞세운 초기 천주교의 정신은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절실하다. 그런 의미를 외면한 채 그저 교회의 가장 높은 사람이 왔다고 반기기만 하다면 교황의 방한은 떠들썩한 이벤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황의 방한은, 부와 권력을 내려놓고 약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하라는 숙제를 천주교회에 던진 것이다.

박광희 부국장 겸 문화부장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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