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금융위기가 임박했던 1994년 12월. 기예르모 마르티네스 멕시코 재무장관은 닥쳐오는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취임하자마자 미국에 손부터 벌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요컨대 단기외채라도 막을 달러를 좀 빌려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앨런 그린스펀 미연준(FRB) 의장은 다급히 워싱턴을 찾은 마르티네스에게 냉담했다. 그는 “미국 정부 차원의 금융지원은 무분별한 투자자들의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만 부추기게 될 것”이라며 오히려 면박을 줬다.
▦ 그린스펀이 틀린 건 아니었다. 수개 월 전부터 멕시코 우려가 파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월스트리트의 미국 기관들은 ‘고위험 고수익’ 투자를 강행해 멕시코 채권 등을 사들였다. 어차피 구제금융이 단행될 것이기 때문에 덤핑으로 멕시코 채권 등을 사서 디폴트가 안 나면 ‘대박’이고, 디폴트가 나도 투자금을 날릴 위험은 크지 않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그런 식으로 멕시코에 잠겨 있던 미국 투자금만 800억 달러에 달했다. 그린스펀은 월스트리트의 무책임한 투자로 인한 손실을 미국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구제금융으로 막아줄 수 없다는 얘기였던 것이다.
▦ 하지만 마르티네스는 발끈했다. 그는 “좋습니다. 그렇다면 멕시코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사실 멕시코 디폴트는 미국의 문제이지, 멕시코 문제는 아니잖습니까?”라고 되받아 쳤다. 국가부도 상태에 몰리면 물가가 치솟아 당장 서민들이 죽을 지경이 된다. 하지만 멕시코가 고통을 감수하고 뒤로 나자빠지면 가장 큰 금전적 손해는 월스트리트가 져야 한다. 마르티네스는 그런 상황을 역이용해 그린스펀을 협박한 것이다.
▦ 마르티네스의 죽기살기 식 협박엔 ‘양털깎기’의 피해자로서 설움도 작용했다. ‘양털깎기’는 선진 자본이 급성장하는 개도국 시장에 진입해 고수익을 누리다가 일시에 썰물처럼 빠져 나와 그 나라를 디폴트 상태에 빠트린 후, 싼 값에 그 나라 자산을 되사는 방식으로 성장의 과실 대부분을 가로채는 수법이다. 미국 자본의 그런 행태 때문에 남미는 이미 1980년대부터 반복적인 금융위기에 시달려왔다. 최근 헤지펀드들과 채무조정협상이 결렬돼 아르헨티나가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빌린 돈을 왜 안 갚느냐고 욕 할 수도 있지만, 아르헨티나로서는 끝없는 ‘양털깎기’의 피해자로서 어깃장이라도 부리고 싶을 것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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