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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정격성과 진정성

입력
2014.07.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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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베토벤 이전 시대의 작곡가 작품을 연주할 때는, 그 작품이 작곡되던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이 대세가 됐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가 200~300년 전에는 요즘과 사뭇 달랐으며, 악기가 다르니 연주법도 다를 수밖에 없고 연주되는 공간과 청중의 수도 달랐다는 생각에서다. 예를 들면 비발디의 ‘사계’는 최근엔 큰 공연장에서 현대 악기의 대편성으로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작곡 당시의 편성에 맞춰 소규모 공연장에서 비발디가 활동하던 무렵 제작된 악기로 연주되는 것이 보통이다. 현대에 제작된 악기를 사용하더라도 고악기를 복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의 재료로 나일론이나 철심 같은 최신 재료를 쓰는 건 격에 맞지 않는다. 양 창자로 만든 전통적인 거트 현을 써야 제격이다. 이런 경향은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면서 바로크 이전 음악이 지나치게 낭만주의식으로 연주됐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 대두된 이 흐름은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 보기 드문 진보적 운동이었고, 바로크 연주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마에스트로라는 호칭을 거부하고, 역사에 정통한 지적인 면모를 과시한다. 유럽의 주요 교회를 순례하며 기독교 절기에 따라 바흐가 남긴 모든 칸타타를 녹음한 존 엘리엇 가디너는 1,000쪽이 넘는 바흐 연구서를 펴냈다.

처음에는 이런 연주를 ‘정격 연주’라고 불렀다. 정격성이란 말이 음악계 바깥에서는 잘 쓰지 않는 말이니 낯설 수도 있지만, ‘authenticity’의 번역이다. 우리가 흔히 ‘진정성’이나 ‘본래성’으로 번역하는 그 단어다. 현대식 연주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고증에 기반한 연주만이 진정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바흐 시절을 아무리 연구한다 하더라도 진짜 그 시절을 재연할 수 있을까? 누가 과거를 정확히 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설령 타임머신을 타고 바흐가 초연한 순간을 기록하고 바흐가 쓰던 악기를 가지고 온들, 그 재연이 과연 예술적으로 타당한 일일까? 어쩌면 21세기에 맞는 바흐 해석이 더 적합한 예술이 아닐까. 만만치 않은 미학적, 철학적 질문들이 뒤따른다. 문제는 정격성이나 진정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다. 자신들의 행위만이 진짜이고 다른 이들의 것은 가짜라는 배제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체로는 긍정적인 뜻일지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는 배제와 차별의 기제로 사용될 수 있다. 실제로 이 단어가 현대사에서 가장 위력을 발휘한 때는 2차대전 직전이었다. 그래서 음악계에서는 이 단어가 오래 사용되지 못했다. 요즘은 가치중립적인 표현인 ‘시대악기 연주’로 일컫는 것이 보통이다.

진정성은 한국 사회에서 설왕설래를 끝내는 말이다. 다른 생각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답보상태에 빠졌을 때 꺼낼 수 있는 마지막 패가 진정성이다. 설령 결과가 썩 좋지 않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일을 했는지 밝힐 수 있으면 책임부담이 한결 가벼워진다. 최근 진정성으로 80년대를 호출하는 목소리가 있다. 억압과 폭력이 난무했던 군사정권에 맞서 운동에 헌신했기에 진정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인식에 따르면 역사적 대의가 사라지고 상업주의에 물든 90년대 이후는 껍데기만 남은 시절일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삶을 살았는지 여부는 오직 스스로 묻고 답하는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또 특정한 삶의 방식만이 진정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법이다. 다만 우리는 타인의 진정성을 그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서만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자신들의 선택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삶을 통해 보여준 이들도 있지만, 과거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일그러진 모습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다시 선거가 끝났다.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었는지 드러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진영을 재확인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무소용이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진정성이 무슨 효용이 있는지 의문을 나타내기 시작한 지 오래다. 2014년 진보의 가치를 고민할 때다.

박정현 건축평론가·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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