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한 때 정약종 일가 복자 추대
시복식 참석하는 후손 규혁ㆍ호영씨
다음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온 가족이 성인과 복자(福者ㆍ성인의 전 단계)가 되는 집안이 있다. 한국 천주교 평신자의 상징인 정약종(1760~1801년ㆍ아우구스티노) 일가다.
약종은 다산 정약용의 네 형제 중 셋째로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ㆍ복녀로 추대되는 예식)에서 복자가 된다. 이미 부인 유조이(체칠리아), 작은 아들 하상(바오로), 딸 정혜(엘리사벳)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때 성인품에 올랐다. 여기에 약종과 큰아들 철상(가를로), 외육촌인 윤지충(바오로)까지 다음 달 복자로 선포되는 것이다.
30일 일가의 생가 터인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성지 성당에서 만난 약종의 방계 4대손 규혁(87ㆍ베드로)씨와 약종의 방계 7대손이자 약용의 직계종손인 호영(56ㆍ클레멘스)씨는 한 목소리로 “감개무량하고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약종은 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에 입교했지만 한국 최초의 평신자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을 맡고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쓸 정도로 일생을 신앙에 바쳤다. 1791년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 이후 둘째형 약전과 동생 약용이 교회를 떠났지만 그는 홀로 남았다. 이후 1801년 2월 신유박해 때 자진 체포돼 서울 서소문 성지에서 참수됐다.
대대로 마재성지를 지키며 살아온 규혁씨는 “약종 할아버지 순교 이후 가문 전체가 벼슬길이 막혀 200여년 간 고생을 했다”며 “증조부도 열나흘 간 밥을 끓이지 못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가문에서는 약종을 아예 족보에서 빼기도 했다. 호영씨는 “‘천주학쟁이’라는 세상의 비난과 억압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라며 “1961년 갱신한 족보에서 처음 약종의 이름을 봤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후손들은 독실한 신앙을 이어갔다. 호영씨는 “약용 할아버지도 배교를 했지만, 죽기 전 유방제 신부에게 죄사함과 은총을 받는 종부성사를 받았다고 문중에 전해지고 있다”며 “그러니 후손들도 신앙생활을 계속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천주교회도 이번 시복을 뜻 깊게 여긴다. 마재성지 성당의 최민호 신부는 “한국 천주교의 조상격으로 여겨지는 정약종,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 성조 5인 중 약종이 처음으로 복자로 인정받게 됐다”며 “약종의 일가는 ‘성가족’이 되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설명했다.
규혁ㆍ호영씨는 16일 광화문 시복식에 정씨 일가의 일원과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다. 호영씨는 “이번 교황의 방한이 약종이 쓴 주교요지의 가르침처럼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으로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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