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의 등장인물 벤지는 과거 속에서 산다. 그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백치로, 겉으로 보면 나이만 먹은 커다란 어린애나 다름없지만 그가 실제로 살아가는 머리 속 세상은 풍요롭고, 섬세하며, 아름답다. 그것은 과거로 이뤄진 세계다. 그에게 현실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촉발시키는 방아쇠에 더 가깝다. 냄새를 따라, 풍경을 따라, 사람들이 나누는 사소한 대화를 따라 그는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중심에는 누나 캐디가 있다. 나무향으로 기억되는 그녀는 유일하게 벤지를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이다. 그녀는 더 이상 여기 없지만 기억 속을 살아가는 그에게는 언제나 거기 존재한다. 그는 현재와 과거가 거미줄처럼 엉겨붙은 이상한 세계를 헤매 다닌다.
기억이란 문제적인 주제다. 많은 학자들이 탐구해왔고,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돼왔다. 우리는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기억이 인간을 구성하는, 혹은 인간존재를 파악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동시에 기억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병으로 분류된다. 흔히 트라우마라고 한다.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현재의 삶이 어려워지고 현실판단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포괄적으로 묘사하는 개념이다. 대부분은 힘든 일을 겪더라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기억을 과거에 두고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기억의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어떤 것을 잊고, 또 어떤 것을 기억할 것인가? 흥미로운 것은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일 때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 더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나쁜 기억일 때 적어도 우리는 그 기억에서 달아나려고 하고, 또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누군가의 시간을 멈추게 한 것이 좋았던 기억이라면 반대로 그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그 순간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려고 애쓰는 것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 인간이 자신의 가장 좋았던 과거 속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할 것이다. 문제는 그 상상 속의 세계관으로 타인들을 바라보고, 세상에 개입하려 할 때 벌어진다. 내밀한 기억에 의거한 허구의 세계를 현실에 건설하려 할 때, 그런 열망이 집단적인 형태로 표출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20세기 끔찍했던 역사를 돌아본다면 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지금의 우리는 과거를 교훈 삼아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는가? 유명인사가 된 유럽의 좌파계열 학자들의 인터뷰나 책을 보면 그들이 1960년대를 돌아볼 때마다 꿈을 꾸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한국의 과거 운동권 출신들이 80년대를 돌아볼 때 짓는 태도이기도 하다. 동시에 종로의 과격한 노인들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시절을 돌아볼 때 짓는 표정이기도 하다. 혹은 풍요로운 90년대를 향유한 X세대들이 대학시절을 향수할 때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또는 취업준비생이 어학연수 시절을 떠올릴 때 나타나는 눈빛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앳된 유부녀가 길가의 여고생들을 보며 느끼는 아련한 그리움일수도 있다.
떠나기 힘든 추억이 나에게도 있다. 어떤 거리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실제 존재하는 거리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내 머리 속에서 그 거리는 조금씩 변형돼 결과적으로는 현실과 별다른 접점 없는 그로테스크한 뭔가가 돼버렸다. 하지만 나는 내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실재하지 않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 거리에 서면 나는 언제나 그곳을 뒤덮은, 나를 추억 속으로 인도하는 수많은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좋았던 느낌과 영원히 함께 머물 수 있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어느 새 떼어낼 수 없는 커다란 혹 같은 게 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좋았던 시절, 순간, 좋았던 느낌을 잊기란 어렵다. 하지만 나빠져만 가는 세상에서 좋았던 과거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살아나가는 것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문득 시대착오적 열망 속에서 괴물이 돼버린 과거를 현실에 불러들이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므로.
김사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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