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바닥을 두들기던 빗줄기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다행이지 싶었지만 아직 어둠이 깔리기 전 저녁 하늘은 언제든 다시 굵은 빗방울을 퍼부을 듯 시커먼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그 시각, 지붕 하나 없이 뻥 뚫린 하늘 아래 한 광장에는 모두 같은 ‘뜻’으로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이 한 가득 모여 앉았다. 광장 가득 빼곡히 앉은 이들은 결연한 얼굴로 흐트러짐 없이 정면을 응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정확히 100일째 되는 7월 24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시 낭송 그리고 음악회-네 눈물을 기억하라’의 풍경은 그랬다. 가슴을 후비는 시구와 잃어버린 사랑의 노랫말들이 울려 퍼지는 내내 시민들은 더불어 공감하고 슬퍼했으며 분노했다.
이 모든 것을 앉은 자리이자 뉘 등 뒤에서 마냥 바라보았다. 불끈 일어나 이 모든 몸짓들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었지만 맨 ‘앞’을 지키는 사진기자가 아닌 광장을 메운 한 사람으로서 ‘뒤’를 지키고 싶었다. 사진 ‘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만 20년 세월의 절반 이상은 ‘현장’을 지키는 기자로서의 삶이었다. 사진기자들에게 있어 현장은 자신의 출입처이자 구체적인 직업 행위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현장을 빗대어 사진기자들끼리 쉬이 ‘아스팔트’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둘 또는 네 바퀴 ‘탈 것’들 뿐만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걸음, 발언과 표현의 몸짓들이 그 위에서 펼쳐진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삶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공간이자 자유의지를 피력하는 ‘아고라’로써, 특히 당대의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연단이 되기도 한다.
숙명처럼 여겼던 ‘아스팔트’를 떠난 지 어느새 8년이 다 돼간다. 허접한 솜씨 탓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도 못했지만 현장을 지키는 기록자로서의 무거운 책무를 내리고 사진행위가 지닌 ‘쓰임’의 여지를 조금은 다른 영역에서 찾고 싶었다. 얼마 동안 나라 밖에서 머물기도 하는 사이 천박한 물질자본에 의해 파생된 동시대의 아픔과 사회적 현안들도 애써 외면해 왔었다. 그 현장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사진기자들과 뜻 있는 사진가들의 몫이라 여기며 용산 참사, 4대강 ‘죽이기’ 사업,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등의 ‘현장’들을 다른 이들의 몫으로 미룬 것이다. 지난날을 추억하며 뭔가 가슴 한 켠이 빈 듯한 느낌에 몸서리치는 사이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단식 10일을 넘긴 유가족들이 안산에서부터 이틀 동안 꼬박 100리길을 걸어 서울시청 앞에 도착한 뒤 유가족 대표가 무대에 올라 남긴 말이다. 자식 잃은 아비의 한 맺힌 절규에 이어 여기저기서 탄식과 눈물 섞인 흐느낌들이 터져 나왔다. 배가 가라앉은 그 순간에도 여동생을 걱정했던 단원고 동혁 군의 어머니는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너무 그립습니다. 그래도… 그래도…”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100일 전 이들은 모두 자식 키우는 재미를 둔 평범한 아버지와 어머니로 하루를 맞이하고 보냈을 터였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내내 사라진 꽃다운 영혼들을 기억하려는 이들의 애달픈 몸짓은 무겁고 진중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나라님들의 ‘희망’과는 달리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이날도 같은 자리에 모여 가만히 있기를 거부했다.
진혼곡의 울림이 멈추고 거리행진에 나선 유가족과 시민들을 따라 아스팔트에 몸을 기댔다. 다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심의 불야성마저 낮은 빛을 내뿜어 거리를 메운 우산들을 형형색색 밝혀줬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외치는 함성은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없이 온 거리를 가득 채웠다. 가만히 뒤를 따랐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무대 위에서 한 대중가수가 ‘잊지 말자’며 온몸으로 열창한 노랫말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을 기억해~. 그게 너란 말이야~.”
그러게. 절대 잊을 일이 아니다. 이젠 할 만큼 했다며 세월호 가라앉듯 수면 아래로 내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여전히 기억하기 위해 다시 되새길 일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기에.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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