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은 성장주의자다. 돈 풀겠단 선언이 낯설지 않다. 빚은 커지고 값엔 거품이 낄 거다. 게다가 정치인이다. 재임 중 성과가 절실하다. 실세라 건들 사람도 없다. 경고등이 켜졌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머리 속에 있는 건 모두 다 밀어붙인 듯싶다. 무려 40조원이 넘는 돈을 풀기로 했고,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규제도 왕창 풀었다. (…)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돈을 풀고 규제를 풀면 경기가 부양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몰라서 못하는 대책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느 정부건 그런 확장적인 경기부양책의 충동을 느낀다. 그래도 신중하게 재고 또 재는 건 돈이든 규제든 풀어놓으면 그 후유증을 감수해야 하는 탓이다. (…) 돈을 더 썼으니 나라 재정은 어려워질 것이고, 빚을 내라고 부추겼으니 가계부채는 늘어날 것이다. 돈의 힘으로 만들어진 가격 버블은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 (…) 경기가 확 살아나지 못하고 다시 주춤하고 있으니 답답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해둬야 할 건 지금 경기는 회복세가 부진한 것이지, 경기 둔화 혹은 침체 국면에 있는 건 아니라는 게 정부 진단이라는 점이다. (…) 과연 지금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과감하고 화끈하게 모든 걸 다 풀자”고 할만한 상황이냐는 데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다. (…) 대책의 내용을 아무리 뜯어봐도 돈과 규제를 푸는 것 외에 눈에 띄는 것이 없다. 구조에 손을 대는 거의 유일한 대책이 기업 금고에 쌓여 있는 돈을 가계 등 실물로 흘러 들어가게 하겠다는 사내유보금 과세 및 인센티브 제도 도입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정부 의도대로 순순히 따를 거라고, 또 그렇다고 해서 돈이 가계로 흘러 들어갈 거라고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최 부총리가 경제구조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대대적인 경기 부양에 나서기 위한 명분 쌓기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팀 수장으로서 재임 중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고 싶어할 최 부총리는 그렇다 쳐도 여기에 누구도 제동을 걸려고 하지 않는 게 더 문제다.”
-돈을 풀면 경제구조가 바뀝니까?(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이영태 경제부장) ☞ 전문 보기
“낙수경제학이란 부자들의 물그릇이 가득 차면 이윽고 그 물이 넘쳐 흘러 가난한 사람들도 잘살게 될 거라는 얘기다. (…) 실제로 교황은 작년 11월에 발표한 ‘복음의 기쁨’, 2장에서 낙수경제학을 강하게 비판했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독재”라고 단언했다. (…) 지난 24일 최 부총리는 새 경제정책팀의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거시정책을 확장적으로 운용하겠다”고 공언했다. (…) 그의 내수 확대란 건설붐을 일으키겠다는 것이고 소득의 증대는 주로 상층의 호주머니로 향한다. 기업이건 가계건 빚이 늘어날 것이다. 과거의 수출주도에 부채주도 성장정책을 덧붙였을 뿐, 그는 낙수경제학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황의 말이라고 모두 옳은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세계를 풍미했던 낙수경제학은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면서 성장은커녕 현재의 장기 침체를 초래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가 그랬듯이 최경환의 ‘가계소득 증대’도 “줄푸세”=“규제 없는 자본주의” 위에 발라놓은 설탕옷일 뿐이다. 8월에 한국에 오는 교황이 이 내용을 안다면 대통령에게 여러 의미로 “독재”를 언급하지 않을까?”
-교황과 최경환의 경제학(경향신문 ‘정동칼럼’ㆍ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 전문 보기
불특정 다수(국민)가 피해자인 범죄의 진상이 특정 소수의 기득권 유지에 해롭다면 국가가 이를 드러내려 할까. 국가는 공정한 제3자가 아니다. 특별법 제정은 주권 환수의 시작이다.
“지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못 믿는 사태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우리를 기만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경험을 수없이 겪어왔고, 그것이 이제는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의 의식변화는 이러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들은 가족을 잃은 비통함만으로 뭉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하고 있다면서 사실은 구조하고 있지 않았고, 희생자 가족들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한다던 대통령의 약속이 그걸 지킬 의도와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이 기만의 뼈저림을 통해 세상을 보는 힘이 엄청나게 예리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건 권력의 논리에 대한 질타이다. 더 이상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신은 오히려 긍정적이다. 각성과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깨우침은 권력에 대한 주권자의 매서운 칼이다. 허위를 도려내고 진정한 정치를 재생시킬 그 칼 앞에서 긴장하고 진실을 밝혀가는 압력을 절감하지 못하는 권력은 얼마 못 가 뒤로 물러설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분노가 만든 ‘긍정적 불신’(경향신문 ‘시론’ㆍ김민웅 성공회대 교수(윤리학)) ☞ 전문 보기
“4ㆍ16 참사 유족들을 중심으로 작성된 4ㆍ16 특별법안의 정식 명칭은 ‘4ㆍ16 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다. 여당과 야당이 각각 내놓은 특별법안이 ‘진상규명’을 내건 것과 달리 이 법안은 ‘진실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 차이는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아주 결정적이다. ‘진상’이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어떤 대상에 관한 말인 데 반해 ‘진실’은 꼭 어떤 대상에 한정되기보다는 그 대상을 둘러싼 관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특별법안의 핵심이 수사권에 있다는 그동안의 논의 방식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 (…) 사실 4ㆍ16 특별법안이 여당이나 야당이 작성한 특별법안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그 수사권을 행사하는 주체의 구성에 있는데도 말이다. 4ㆍ16 특별법안은 16명으로 구성되는 특별위원회의 절반인 8명(위원장 포함)을 피해자 단체에서 추천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을 남들에게 맡기지 않으려는 유족들의 강한 의지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권 요구는 경찰이나 검찰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진실규명 과정의 민주화라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 4ㆍ16 특별법안은 진실이란 밝히는 것이라기보다 만드는 것임을 시사한다. (…) 진실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진실을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가 문제가 된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만드는 열린 과정 자체이며 그것을 통한 사회성의 회복이다.”
-진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한겨레 ‘세상 읽기’ㆍ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전문 보기
과거를 감추는 건 개인 자유다. 젊은 시절 새긴 문신이 어느 순간 부끄러워질 수 있다. 하지만 비리 이력은 다르다. 사회ㆍ타인한테 필요한 정보다. 잊힐 권리 잊을 의무 따윈 없다.
“유럽에선 본인이 노출을 원하지 않는 정보를 구글이 검색을 통해 타인에게 제공해선 안 된다는 이른바 ‘잊힐 권리’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 이후 유럽 구글에는 자기에게 불리한 정보의 삭제를 원하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만도 아니다. 요즘 일부 국내 포털에는 자기 인물 정보 경력란에서 ‘석사 학위’를 지워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이는 선거나 개각이 있을 때면 더욱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인사청문회에서 주요 공직 후보자들이 논문 표절 의혹 등으로 혼쭐이 나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자기 학력란에서 석사를 지워줄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이 남긴 말과 글은 바로 ‘그 사람’이다. 미국만 해도 공무원을 채용할 때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상의 아이디 등으로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반드시 확인한다. (…) 그런데 이를 찾아볼 수 없게 정보를 지우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를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종이를 발명하고, 책을 만들고, 인터넷까지 만들어낸 것은 망각(忘却)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인류는 경험과 기억을 축적했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잊힐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퇴행(退行)이자 문화 파괴처럼 느껴진다.”
-과거를 묻지 말라고?(조선일보 ‘데스크에서’ㆍ신동흔 산업2부 차장) ☞ 전문 보기
“‘진실유포죄’는 인권의 보호와 사회의 발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 그럼에도 진실유포죄를 도리어 확대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바로 ‘잊혀질 권리’다. 즉 자신의 과오나 상처를 상기시켜주는 글의 유통을 제한할 권리다.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사생활의 비밀 침해가 없는 게시물도 관련 사실을 타인들의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면 공론의 장에서 지울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뜻대로 된다면 비리에 대한 고발은 지금보다 더 어려워진다. (…) ‘합법적인 진실이라도 공익적이지 않으면 입을 다물라’는 명령은 개인의 윤리적 독립성에 남겨져야 할 표현과 사상의 영역까지도 집단적 결정으로 재단하겠다는 전체주의의 망령으로 들린다. “잊혀질 권리를 일률적으로 거부하지 말고 게시글 하나씩 따져보자고?” 그렇게 집단적인 돋보기를 들이대는 순간 ‘이해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수많은 개인들의 소통욕구는 증발하거나 지적 게토로 숨어들 것이다. 그런 의미의 ‘잊혀질 권리’는 어차피 세계 어디에도 입법화된 바 없다. (…) 유럽개인정보보호규범을 해석 적용한 구글 스페인 판결에서도 게시글의 유통 자체는 막지 않았고, 구글의 ‘인명검색’에서만 배제했던 것이다. 유럽의회도 ‘잊혀질 권리’ 논의를 폐기하고 ‘자신이 제공한 정보(‘자신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를 삭제할 권리로 대체하였다. ‘잊혀질 권리’는 더 이상 일고의 가치도 없다. (…) 사람들의 결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한 상황에서, 명예훼손도 아니고 프라이버시 침해도 아닌 어떤 합법적인 정보가 단지 타인에 대한 정보라고 해서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검색을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잊혀질 권리, 진실유포죄, 세월호(7월 21일자 중앙일보 ‘시론’ㆍ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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