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광기 속에서 파시즘 등에 대항 아무도 책임 안 지는 사회에 메스
한일 지식인들 국제학술회의 열어 평화·민주주의 향한 신념 기려
아베 일본 정권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을 결정해 논란을 불러 오고 있다. 내각의 헌법해석 변경으로 일본 ‘평화헌법’의 핵심을 훼손한 것은 입헌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 같은 우려를 거듭 표시해온 일본 국민을 무시하고 일부 정치인의 신념을 강제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영향과 여파는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번 집단적 자위권 용인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이웃나라가 구축해온 우호 협력관계의 핵심적인 기반을 무너뜨려버린 것과 다름없다. 과거 청산과 영토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깊었던 동북아시아에 다시 긴장이 감돌고 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군국주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파시즘과 군국주의 비판한 사상가
다시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는 일본을 보고 있노라면 탁월한 정치학자이자 사상가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ㆍ1914~96).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국을 식민지로 점령하고 마침내 미국과도 일전을 불사하며 온나라를 전쟁의 광기 속으로 몰아간 한가운데서 일본의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을 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던 지식인이다.
마루야마는 살아 있을 때 일본 지식인사회에서 ‘마루야마 텐노(天皇)’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이 일왕에 비견될 정도로 탁월하다는 뜻이었다. 그가 타계했을 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는 추모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루야마 선생이 일본의 다양한 전문 분야의 지식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1914년)에 태어난 그의 젊은 시절은 만주사변(1931년)→중일전쟁(1937년)→태평양전쟁(1941년)으로 이어지는 일본 군국주의 진로와 겹친다. 당시 그는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 영향도 받았다. 사회주의 관련 연설회에 갔다가 체포 당해 하룻밤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1940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조교수가 된 후에야 비로소 ‘요주의 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막바지에 내려진 ‘총동원령’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늦은 나이(30세)에 입대한 그가 이등병으로 처음 배치된 곳은 평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기병 때문에 제대를 명령 받고 도쿄로 돌아왔지만 몇 달 뒤에 재소집됐다. 1945년 3월 다시 배치 받은 곳은 히로시마(廣島) 우지나(宇品)의 육군선박사령부였다. 5개월 뒤 그가 근무하던 사령부에서 불과 5㎞ 떨어진 곳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사실상 그도 원폭 피해자인 셈이었다.
개인의 ‘주체의식’ ‘양심’을 강조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히로히토(裕仁ㆍ1901~89) 일왕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언했다. 패전의 충격과 좌절 그리고 혼돈이 팽배한 시절, 광기에서 갓 깨어난 것처럼 낯설게 여겨지던 상황에서 다시 도쿄대로 돌아온 마루야마가 발언하기 시작했다. 종전 이듬해 5월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기고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짤막한 글이 시작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지난날 일본의 파시즘과 군국주의 체제의 독특한 메커니즘과 그 속에서 무감각하게 지냈던 일본인들의 심리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일왕으로부터의 거리, 억압을 떠넘겨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정신적 균형, 심지어 일왕조차도 책임을 역사와 전통에 돌려버리는 메커니즘 등을 이 글에서 해부했다.
요컨대 그는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고 말했다. 배경에는 자유로운 개인의 ‘주체의식’과 ‘양심’을 기대할 없는 사회문화적인 풍토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일본 지식인들과 논단은 우선 충격을 받았고, 더불어 그의 글에서 희망의 단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루야마는 잇따라 일본 내셔널리즘과 파시즘, 군국주의 지배체제와 정신형태를 분석하는 글들을 쏟아냈다. 일본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들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칼을 들이댔다. ‘무책임의 체계’ ‘이론신앙과 실감신앙’ ‘부챗살 유형과 문어항아리 유형’ '‘이다’라는 것과 ‘하다’라는 것' 등 독특하고 창의적인 자신의 고유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인간과 정치, 권력과 도덕, 지배와 복종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화두로 삼아 자신만의 ‘마루야마 정치학’을 구축해냈다.
그의 학문 활동은 내면적인 양심의 자유를 갖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동에 기꺼이 책임을 지는 ‘주체’를 확립하라는 주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주체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시민’의 미덕을 갖추어야 했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
“자네들은 나치보다 더 나쁘다”
하지만 그에게 언제나 환호와 박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통에 얽매인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도 격결한 비판과 논쟁이 따랐다. 그로서는 개인의 자유를 돌아보지 않는 다수 민주주의의 ‘위험’을 체감하기도 했다. 1960년대 말 당시 일본을 휩쓸었던 대학 분규에서 그러했다. 연구실을 황폐하게 만들 정도의 ‘전공투(全共鬪)’ 학생들의 과격한 폭력 시위를 참다 못한 그가 일갈했다. “자네들은 나치보다도 더 나쁘다.” 그는 그들의 지나친 행위를 ‘광란의 어리광’이라고 야단쳤다.
그를 존경하던 젊은 대학생들의 원성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마루야마를 “기만에 찬 전후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규탄했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뼈아픈 일이었다. 3년 남았던 정년퇴임에 미련도 없이 1971년 도쿄대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해석학으로 일본사상사 연구에 깊이 몰두했다. 만년에 그는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야말로 자신의 본령이었으며, 현실적인 발언이나 사회참여는 일종의 부업이라며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더 많이 읽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돌아보지 않는 민주주의는 일종의 허상이라는 인식 하에 다수의 전제와 횡포, 민중주의와 포퓰리즘를 경계하면서 양심의 자유와 인격적 주체 확립을 주장했던 그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냉전 시대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좌파 전체주의는 물론이고 매카시즘 같은 우파 전체주의에도 맞서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적극 옹호했던 몇몇 세계적인 지식인 그룹에 속하는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대열에는 이사야 벌린, 마이클 오크숏, 칼 포퍼 같은 ‘냉전 시대 자유주의’를 주창한 사상가들이 포함된다.
일본이 마루야마 기억하고 재발견해야
지난달 마루야마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은 제자들인 히라이시 나오아키 도쿄대 교수와 마쓰자와 히로아키 홋카이도대 명예교수가 ‘우리는 현정권이 강행하는 해외 무력 행사 구상에 반대합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과거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침략을 확대해 일본 안팎에 참화를 안겨준 것에 대한 반성에 기초하여 헌법 9조로 표명했던 평화주의의 의의를 재확인했다. 아울러 아베 정권이 자의적으로 그 원리를 바꾸는 것은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라고 경고했다.
올해는 마루야마 마사오 탄생 100주년이다. 그가 태어난 지난 3월에 일본에서는 행사들이 많았다. 지난 24, 25일에는 서울(아산정책연구원)에서도 ‘마루야마 마사오와 동아시아 사상:근대성, 민주주의 그리고 유교’를 주제로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일본에서는 오쿠보 다케하루(게이오대), 고노 유리(도쿄수도대), 와타나베 히로시(법정대), 요네하라 겐(오사카대) 가루베 다다시(도쿄대), 강동국(나고야대) 교수가, 한국에서는 고희탁(연세대) 이기원(강원대) 유불란(경희대) 박홍규(고려대) 교수 등이 발표했다. 전후 일본에서 평화, 인권,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타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 마루야마의 학문과 사상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자리였다. 이번 학술회의에 참가한 한국 학자 등은 28일 ‘우리는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반하는 아베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결정에 반대한다’는 성명도 발표한다.
한 일본 정치학자의 탄생 100년을 기념해 한국에서 국제학술회의를 연 것은 마루야마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건전한 시민들의 비판정신에 보내는 일종의 ‘공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더 많은 일본 국민들이 마루야마 사상과 비판의 의미를 다시금 ‘기억’해내고 나아가 현재 일본의 진로를 진지하게 되돌아보기를 권유하는 애정 어린 ‘조언’이기도 하다.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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