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유엔본부는 23일 하루 종일 반기문 사무총장 발언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반 총장이 전날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한 말에 대해 유엔과 미국 국무부의 발표와 해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언은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회담 직전 국제언론과 가진 회견에서 나왔다. 케리 장관이 말한 이후 반 총장이 입을 떼려 하자 갑자기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반 총장, 하마스를 지원하는 카타르가 돈을 댄 비행기를 타고 여기에 온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반 총장이 하마스를 지원해온 카타르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쿠웨이트, 이집트를 거쳐 이스라엘에 온 것은 이행충돌이라며 문제 삼은 것이다.
이날 오전 국무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이 때 반 총장은 “아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늘이 사태 발생 15일째다. 우리는 규칙들을 숙고할 많은 시간이 없다(We do not have much time to weigh the rules)”고 답변했다. 카타르 전세기를 탄 건 부적절하지만 다른 대안을 찾을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엔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녹취록은 전혀 달랐다. 유엔은 케리 장관 발언과 기자 질문까지 삭제한 뒤 발언만을 공개했다. 발언도 “신사숙녀 여러분, 오늘이 사태 발생 15일째다. 우리는 기다리며 잃어버릴 시간이 많지가 않다(We do not have much time to wait and lose)”로 시작됐다. 국무부와 비교하면, 반 총장이 기자 질문에 “아니다”고 답한 말이 빠졌고 “규칙들을 숙고할”(weigh the rules)이 “기다리며 잃어버릴”(wait and lose)로 바뀌었다. 반 총장의 발언 취지도 카타르 전세기 문제는 쏙 빠진 채 지금은 낭비할 시간이 없을 만큼 사태 해결이 시급하다고 강조한 것으로 변했다.
유엔 출입기자단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유엔이 반 총장이 곤란한 부분을 고의 삭제했다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때문이다. 반 총장의 음성 녹음을 공개하라는 요구도 나왔다. 파란 하크 사무총장 부대변인은 유엔 자료가 맞다는 말을 반복했으나 국제언론의 의구심은 커져만 갔다.
위기에 처한 반 총장과 유엔 구하기에 나선 곳은 미국이었다. 국무부가 이날 저녁 아무 설명도 없이 슬그머니 녹취록을 수정해 재 공개한 것이다. 수정된 녹취록은 반 총장의 발언 중 “규칙(rules)들을 숙고할”을 유엔의 발표대로 “기다리며 잃어버릴(lose)”로 바뀌어 국무부 홈페이지 전면에 게재됐다. 가열되던 논란이 해프닝으로 해석되며 잠잠해진 것은 물론이다.
외교 소식통은 “국무부가 전문가들이 풀어 쓴 녹취록을 수정하는 건 전례가 거의 없다”며 “굳이 국무부가 이렇게 한 것은 총장에 대한 미국의 배려로 보인다”고 평했다. 유엔 소식통은 “반 총장 발언을 직접 들어본 사람들도 문제가 된 발음이 룰즈(rules)인지 루즈(lose)인지 헷갈렸다”며 “이날 논란은 결국 한국인의 취약점인 ‘r’과 ‘l’ 발음이 빚어낸 소동이다”고 말했다.
뉴욕=신용일 미주한국일보기자 yishin@hk.co.kr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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