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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성스러운 곳에서 보내는 시간

입력
2014.07.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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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인도의 작은 마을 부다가야에 머무른 적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불교 성지인 이곳의 중심은 마하보디 사원이었다. 부처님의 득도를 지켜본 나무의 씨를 받아 키운 보리수 나무 주변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스님들이 수행 중이었다. 개인의 해탈과 중생의 구원을 간구하는 분들이 일구어내는 기운은 맑고 평화로웠다. 며칠을 드나들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 보니 나도 명상수행을 해보고 싶다는 발심이 생겨났다. 나는 마을의 티베트 사원에서 운영하는 명상센터를 찾아갔다.

센터의 규칙은 엄했다. 살생, 거짓말과 도둑질, 성적 접촉, 음주와 흡연은 기본적인 금기이고, 외출도 금지된 상태로 열흘간 침묵 속에서 채식을 해야 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9시까지 명상과 교리 강의, 요가와 토론이 이어졌다. 반골 기질 때문인지 나는 센터의 규칙을 다 지켜내지는 못했다. 살생 금지의 규칙을 따르느라 사흘 밤을 강제 헌혈에 시달리다가, 마침내는 맹렬한 분노를 실은 손바닥으로 아홉 마리의 모기를 때려잡는 한밤의 학살극을 자행하기도 했다. 명상이나 요가도 쉽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온갖 잡생각이 다 떠오르는지 불 난 초가집의 빈대 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마음은 도무지 통제 불능이었다. 그래도 늦은 밤에 혼자 108배를 올리거나 내딛는 발걸음에 집중하며 느리게 걷는 ‘위빠사나’ 명상을 할 때면 번잡하던 내 마음도 한결 차분해지곤 했다. 종교는 자신만의 방 안에서 고요히 머무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빌었다. 명상과 기도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다른 존재의 평안에 대한 기원이었다.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인간 뿐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생명을 위해- 그토록 빌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보낸 나흘째 되는 날은 성탄절이었다. 그날 새벽 예불 시간에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인사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기쁜 날입니다. 모두에게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날 저녁, 티베트 불교의 큰스님의 설법을 들으러 갔을 때도 스님은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로 설법을 시작했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맞은 가장 따뜻하고 평화로운 성탄절이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주제에 여행지에서 내가 빼놓지 않고 찾아 다니는 곳은 종교적 성소다. 이란을 여행할 때면 블루 타일의 미묘한 빛깔에 현혹되어 이슬람 사원을 찾아 다녔고, 인도의 조로아스터교 사원에서는 대리석을 종이처럼 얇고 정교하게 깎아 만든 장식-일꾼의 일당은 깎아낸 먼지의 양으로 계산됐다-에 취해 하염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다 목을 못 가눌 지경이 되기도 했다. 유럽이나 남미에서는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성당을 찾아가 기도를 올린다. 그것도 모자라 스페인의 가톨릭 순례길 카미노데산티아고, 일본의 불교 순례길 헨로미치를 찾아가 걷기도 했다.

나는 왜 그토록 종교적인 장소에 끌리는 걸까. 모든 종교적 성소에 깃든 영적인 신성함 때문인 걸까. 그곳에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풀리지 않는 현재에 대한 답답함,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고통을 안고 찾아온 이들을 위로하는 성스러운 침묵이 감돈다. 종교적인 장소에 드리운 어둠과 침묵, 서늘한 냉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미천함을 고백하게 만들기에 적절한 권위를 두르고 있다. 결국 교회와 사원과 절은 겸손함을 배우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살면서 누구나 지을 수밖에 없는 죄를 고백함으로써 너나없이 가여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곳이다. 그 마음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가는 공간이다. 결국 모든 종교의 탄생 또한 측은지심에 기반하지 않았던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포기한 종교를 나는 상상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가 지어 올린 성전의 모습을 떠올리면 부끄러움을 넘어 절망이 밀려든다. 얼마 전 부다가야의 사원에서 공격적이고 무례한 선교행위를 자행한 이들은 자신들이 신의 이름으로 장벽을 쌓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깨닫게 될까.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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